아름다운 합의: 예루살렘 공의회(행 15:1~21)

아름다운 합의: 예루살렘 공의회(행 15:1~21)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12

이승호 교수
2022년 11월 17일(목) 06:19
행 15장에 언급된 예루살렘 공의회는 사도행전 전체에서 중요한 전환점 또는 분기점을 이룬다(갈 2:1~10 참조). 이 공의회를 기점으로 선교의 무대가 예루살렘에서 이방지역으로 완전히 옮겨지기 때문이다. 1차 선교여행(행 13:4~14:28)의 성공으로 많은 이방인이 교회로 들어오자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이방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간의 실질적인 교제(코이노니아)와도 관련이 있다(정결과 연관하여 9절 참조).



1. 회의의 발단(1~5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예루살렘)로부터 안디옥교회로 와서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쳤다(1절; 참조 5절, 24절). 바울과 바나바의 입장에서 이러한 가르침은 안디옥교회의 구원 보편적인 복음을 위태롭게 하고 전체 교회의 통일성을 붕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논쟁이 심해지자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대표자 몇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로 보내서 이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였다(2절).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 공의회의 초점은 이방인들의 구원 여부가 아니라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율법 준수 여부에 있었다. 이 문제의 시금석이 된 것이 바로 할례였다.



2. 회의의 경과(6~21절)

격렬한 토론 끝에 베드로가 먼저 발언한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이방인 선교의 문을 열었기 때문에 먼저 발언할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행 10~11장). 그는 이방인 고넬료와의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이 성령을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똑같이 주셨고(8절) 믿음 외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9절). 구원은 인간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이방인을 제한 없이 받아들이자는 견해가 그의 주된 입장이다(11절).

바나바와 바울은 하나님이 이방인들 가운데 행하신 모든 표적과 기사에 대해 보고함으로써 베드로의 견해를 지원한다(12절). 마지막으로 주의 형제 야고보가 베드로의 발언을 지지하며 최종 결정을 내린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공의회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력이 베드로로부터 야고보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행 12:17; 갈 2:9 참조). 베드로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이방인의 구원을 증언했다면 야고보는 성경(암 9:11~12)을 인용하여 이방인의 영입을 정당화한다(15-18절). 본래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영광 회복의 관점에서 기술된 아모스의 예언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참여하는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로 재해석된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회의 결정에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는 좋은 모델이 된다.

그러나 할례와 상관없이 이방인을 받아들인다는 결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제 구체적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교제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길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래서 야고보는 유대 그리스도인 측을 고려하여 일종의 절충안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준수해야 할 네 가지 실제적인 지침들을 설정하는 것이다. 즉 우상의 더러운 제물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이었다(20절). 이러한 조항들은 구원에 필수적인 조건들이 아니라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 간의 코이노니아를 위한 최소한의 정결 지침으로 제시된다.

결과적으로 예루살렘 공의회는 바울의 이방 선교와 구원 보편주의를 최종적으로 인정한 회의였다. 이 회의를 통해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 특수주의자들은 할례 문제를 양보하고 안디옥교회의 구원 보편주의자들은 부가적인 율법 조항을 양보함으로써 문제와 갈등이 아름답게 합의되었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 공의회는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고 사랑의 교제를 잃지 않으면서도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지켜낸 최초의 '에큐메니컬 회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아름다운 합의 배후에는 성령의 주도하심이 있다(28절 참조).

이승호 교수 /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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