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터 문(門)이 열리기까지

센터 문(門)이 열리기까지

[ 현장칼럼 ]

길준수 사무국장
2024년 03월 22일(금) 08:36
이 이야기 먼저 시작해야겠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가정복지센터'는 17년 전 월계동 주민들의 시위로부터 시작했다. 당시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전 갱생보호공단)이 한 건물을 매입해 '갱생원(출소자들의 재활을 돕는 시설)'을 설치하려 하자, 혐오 시설로 판단한 지역주민들이 극렬하게 반대했다. 100일이 넘는 시위 기간에 지역주민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결국, 지역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 건물은 구청 소유의 '복지시설'이 되었다.

먼저 문화교실과 체력단련실, 아동·청소년 방과후교실을 시작했다. 이어서 나눔과 쉼을 위한 카페를 설치했고, 소규모나마 지역의 열악한 환경 속 지친 이들을 위한 보호 사업을 시작했다. 열악한 재정 상황에서 직원들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이후 청소년 사업과 아동 방과후교실 사업을 계속해서 확장해 갔다.

처음엔 초등 저학년 20명 정원으로 방과후교실을 시작했다. 지역 청소년을 위해서는 '처럼'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취미활동 중심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여기에 약간의 학습 프로그램을 병행했다. 해가 지날수록 저학년 방과후교실을 졸업하는 아이들이 생겨났고, 자녀 학습에 대한 지역주민의 욕구가 늘어났다. 이후 초등 '고학년' 방과후교실이 생겨났다. 청소년 동아리도 사업을 확장하여 학습과 문화 활동, 멘토링과 인성교육까지 겸비한, 청소년 전문 방과후교실로 변화했다. 초등 1학년부터 고등 3학년에 이르기까지, 많을 때는 80여 명의 아이가 센터를 가득 채웠다. 아이들의 활기찬 기운과 직원들의 열정이 어우러져 때로는 시장 한복판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먹거리까지 준비되는 날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많아지니 문젯거리도 덩달아 많아졌다. 다치고 흥분하고 싸우고 억울한 아이들이 생겨났다. 학습지도와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는 교사들에게는 버거운 상황이 펼쳐졌다. 이에 센터는 아동·청소년을 위한 '상담실'을 개설하여, 심리적인 문제가 있거나 다툼과 같은 위기 상황에 상담교사가 즉시 개입할 수 있게 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센터는 그때그때 시대의 흐름에 적절하게 응답했다. 학구열 높은 지역 학부모들에 발맞추어 사업을 추진했고,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면서 부모 역할을 대신하여 다양한 예비 사회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노력했으며, 예기치 않은 재난과 아픔에도 공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아동·청소년들의 공감 능력과 책임 의식을 고취했다.

당시 복지센터가 위치한 월계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된 동네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재건축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재건축조합을 비롯해 재건축과 관련한 모든 행정 절차가 마무리될 시점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6년밖에 되지 않는 복지센터 사업을 재건축 때문에 종료한다는 구청의 결정이었다. 복지센터가 없어진다는 소식이 지역주민들에게도 전해졌다. 염려하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재건축 지역에 속하지 않은 곳에 여전히 돌봄이 필요한 아동·청소년과 열악한 환경 속 주민들, 여가와 쉼을 누려야 하는 이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복지센터 시설운영위원들이 먼저 앞장서서 지역주민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센터 사업종료에 반대하는 서명운동도 함께 추진했다. 탄원서와 서명 결과를 구청에 전달했고, 결국 복지센터를 유지하는 것으로 재결정됐다.

마을 재건축이 진행되는 동안, 센터는 임시 거처가 필요했다. 여러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장석교회(센터운영 수탁체)의 도움을 받아, 교회 교육관 2층 공간을 임시 센터로 사용할 수 있었다. 공간이 비좁아 센터사업 대부분을 축소했다. 특히 문화강좌, 북카페, 체력단련 등 지역주민에게 여가와 쉼을 제공했던 사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는데, 임시 거처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임시 거처'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잠시 머물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새로운 센터를 설립하기까지는 무려 6년여 시간이 더 지나야 했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적절히 적응해 갔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아동·청소년 방과 후 사업과 가족복지사업에 센터 역량을 집중했다. 반면 이전에 복지관처럼 추진했던 사업들은 축소하거나 현상 유지 정도에 그쳤다. 재건축이 진행되는 동안, 구청은 새 시설의 명칭을 '월계문화복지센터'로 정했다. 우리는 새로 건립할 센터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했다. 인사관리와 행정체계의 수준을 조금씩 높여갔다. 직원의 문서작성 능력도 강화했다. 사회복지 관련 자격을 갖추기 원하는 직원에게는 시간과 공간을 허락했다. 이러한 노력 덕택에, 우리는 새로운 복지센터 위탁과정과 설립과정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2018년 5월 31일, '가정복지센터'는 월계동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후 사라졌다. 대신에, 마치 이 지역 랜드마크가 된 듯이, 3개 자치구가 맞닿아 있는 독특한 위치에 '문화복지센터'가 우뚝 섰다.



길준수 사무국장 / 구립월계노인복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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