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간75주년기획 ] '역사에게 내일의 길을 묻다' 8. 쇄국을 넘어 성경 보급한 '존 로스'
김보현 목사
2021년 08월 24일(화)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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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랜드의 중심 도시 인버네스(Inverness)에서 만나볼 인물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긴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이다. 로스 선교사 이전에도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시도들은 계속되었다. 구츨라프 선교사는 서해안을 답사하며 섬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과 주기도문, 서양의 문물을 전파했고,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을 따라 내륙까지 들어와 생명을 바치며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1872년 로스 선교사가 중국에서 사역을 시작하기 불과 6년 전의 일이다.
로스 선교사의 생애는 고향 인버네스에서 보낸 유년 시절로 시작하여 신학 수업을 받고 목회자로 지역교회를 섬겼던 30년 기간과 그리고 선교사로 파송 받아 중국 동북부 지역, 영구와 심양 등지에서 사역하며 동관교회를 개척하고 최초의 한글 성경을 번역했던 38년의 기간, 그리고 은퇴 후 고국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메이필드 솔즈베리 장로교회 장로로서 섬겼던 마지막 5년 등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21세기 들어서면서 로스 선교사는 한국에 파송돼 사역한 1850명 선교사 가운데 비교적 많은 관심이 모아졌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000년 봄, 그가 말씀을 전했던 고향 교회가 개인에게 매각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한국 교회에 전해진 바 있다. 그래서일까. 스코틀랜드 내에 그의 자취가 서린 곳이면 어김없이 다양한 기념물들이 2010년까지 10년 어간 집중적으로 설치되고 조성돼 지금도 방문자들을 맞고 있다.
2001년 에딘버러에, 유학생과 그 가족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설립될 때 그 이름을 이견 없이 '로스채플'로 정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에딘버러대학교 신학부 동문들을 중심으로 로스선교사를 기념하는 장학금도 조성해 에딘버러대학교에 기탁한 바 있다. 2006년에는 그의 마지막 봉사처였던 메이필드 솔즈베리 교회 안에 한국교회 성도들의 감사의 마음을 새긴 동판이 제막됐다. 이와 함께 그가 잠들어 있는 뉴잉턴 묘지에는 2010년 대한성서공회가 한글 성서 완역 100주년을 기념해 기념 석판을 부설했다. 같은 해 서울영락교회 목회자와 교우들은 로스 선교사의 인생 여정을 순례하며 선교사로 파송 받기 전 시무했던 스카이섬의 포트리 교구교회를 방문, 기념 동판 제막식을 가졌고, 인버네스를 찾아 로스 목사의 가족들이 기거했던 집에서 그의 생애와 사역 기념비 제막식을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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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로 사역한 40년 가까운 기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직 안수 받기 전의 목회자 존 로스를 만날 수 있다. 그가 섬겼던 포트리(Portree)는 지리적으로 경관이 빼어난 하이랜드 서북지역의 스카이 섬의 항구마을이다. 현재는 배편을 통한 접근보다는 연육교를 접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섬 입구에 다가서니 하이랜드 배경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엘란도난' 성이 먼저 반겨준다. 잉글랜드 지역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높은 산과 기암괴석들이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 하다.
교회 방문을 약속한 날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현재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소속인 포트리교회를 담임하는 산도르 목사는 이 교회를 시무하며 코로나 이전까지는 많은 한국교회 방문객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는 헝가리 뿌리를 가진 루마니아인으로 스코틀랜드장로교회에서 훈련을 받고 귀국했으나 교회를 섬기던 중 다시금 초청을 받아 이곳에서 목회 중이라고 한다. 예배당 전면에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성인들을 통해 1500년 이 지역의 기나긴 기독교 역사를 듣는다. 예배식 벽면에 한글과 영어로 새겨진 로스 선교사의 사역에 대한 한국 교회의 감사패 아래서 선교사로 떠나기 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또한 듣노라니 '증인'에게는 국적도 인종도 장애도 제한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목회자 존 로스가 이 외딴 지역에 부임한 이유에 대해 대부분의 연구가들은 그의 뛰어난 언어 실력을 꼽는다. 공용어인 영어는 물론 고유한 겔릭어에 또한 능통했던 그야말로 하이랜드 교회의 목회 적임자로 여겨졌던 것이다. 여기에서 대체 무엇이 중국 선교사로 파송받은 존 로스로 하여금 문이 굳게 닫힌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하고 헌신하게 했을까 하는 궁금함을 갖게 된다. 그와 동역자들로 인해 한국은 공식 선교사가 입국하기도 전에 최초의 세례가 이뤄지고 우리 민족은 모국어로 된 성경을 손에 들고 스스로 복음을 전하는 역사를 갖게 된 것이다.
코로나 때문일까? 드물게 만나는 마을에서도 좀처럼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지도에 표기되어 있는 존 로스 목사 기념비를 찾아 간다. 그의 고향 마을 바닷가에 세워진 기념비는 얇은 돌판 위에 새겨진 로스 선교사의 모습과 함께 그가 이 지역 출신으로 한국과 중국에서 사역하며 최초로 신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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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고 자란 고향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우선 '인버네스'라는 지명에서 보듯이 괴물의 전설로 알려진 네스(Ness)호수로부터 이어진 강 하구(Inver)에 형성된 마을로 하이랜드의 내륙 지역과 북해를 향해 펼쳐진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아 왔다. 이로 인해 외세의 침략도 많았으나 문물의 교류도 왕성했으리라.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던 부모의 영향으로 하이랜드 문화 속에 살던 유년 시절을 지낸 후 일찍이 대도시로 나가 학업을 이어가면 전통과 신문물의 영향도 자연스레 받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6세기에 세인트 콜롬바에 의해 기독교가 전래된 곳으로 켈트 기독교의 포용적 영성을 세례 받았을 것이다. 여기에 '문양'을 뜻하는 픽트족의 후예로서 어린 시절 지금도 해안가에서 만날 수 있는 8세기 돌비의 신비한 문양을 보며 어린 로스는 무한한 상상 속에 그 의미를 새겨보았으리라.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는 로스역의 출현과 전파 과정에 대해 전하고 있다. 당시 국내 밀반입을 시도하던 권서인이 머물던 여관의 주인이 발각을 우려해 성경의 폐기를 종용했다. 결국 성경은 강물에 투기되거나 소각되었다. 로스는 이 충격적 사건 소식을 듣고 "성경 씻은 물을 마시는 이마다 생명을 얻게 될 것이요, 성경 태운 재를 입는 이마다 크게 성장하게 될 것이라" 예언적 고백을 했다고 한다.
중국에 파송 받아 조선을 마음에 품은 로스는 쇄국의 장벽을 넘어설 방법을 강구하다 선교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의 성경 번역과 다양한 경로를 통한 보급 노력은 그야말로 쇄국 상황을 무력화 한 시대에 앞선 새로운 선교 전략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투기 소각 사건에 대한 그의 고백 속에는 앞서 만나본 성경 번역으로 이단에 몰려 화형에 처해졌던 여러 개혁자들의 유언과 신앙인들의 고백이 겹쳐져 들리기도 한다. 죽음의 십자가를 부활의 출발로 승화시킨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듯 하다.
토마스 선교사와 같이 신혼의 아내와 어린 자녀까지 선교지에서 묻어야 했던 선교사, 강 건너 조선 땅과 민족을 향한 사랑의 수고를 자임했던 그의 삶은 각별한 인연으로 한국교회와 함께 했다. 1882년 쇄국의 빗장이 풀리던 해 첫 한글 복음서가 때맞춰 출간됐다. 1887년 완성된 첫 신약성경을 손에 들고 조선을 방문했을 때 그는 새문안교회 첫 예배에 참석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1910년 지병으로 약해진 노구를 이끌고 은퇴해 귀국한 그에게 주어진 상급은 그가 성경으로 섬겼던 조선 민족의 교회가 자라 300여 선교 지도자들 앞에서 당당히 그 열매를 고백하고 전하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바닷가 그의 기념비에 기대어 서니 따듯한 바람이 선교사의 조선 사랑 그 마음처럼 긴 여정에 지친 나그네를 품어주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