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와 함께해 온 기독교 사학

한국 역사와 함께해 온 기독교 사학

[ 3월특집 ] 기독교교육을 회복하라 ④한국 역사 발전에 기여한 기독교 사학

임희국 교수
2024년 03월 22일(금) 08:00
우리나라의 기독교 학교는 1885년 조선 정부의 비자를 받아 정식 입국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됐다. 아펜젤러가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웠고, 스크랜턴 모부인이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세웠으며, 언더우드가 언더우드학당을 세웠다. 정부는 선교사들의 교육사업이 개화 정책에 잘 부합되리라 기대했다. 이때의 기독교 학교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인재 양성이 과제였다.

19세기 말 기독교 학교가 확산되는 가운데, 1897년에 장로교 선교부가 교육정책을 공포했다. '우리의 교육정책(Our educational policy)'은 "학생들을 일꾼으로 자라게 하고, 이를 위하여 학교는 학생들의 신앙증진과 정신함양을 위해 교육해야 할 것이며, 그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교회의 주축이 되어서 토착교회(native church)를 조직하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학생들이 장차 "농부나 대장공이 되건, 의사나 교사가 되거나 혹은 정부의 관리가 되던지 복음을 전하는 능동적인 복음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 시기의 기독교 학교는 교회와 사회의 인재 양성을 위해 복음의 신앙인으로 양육하고자 했다.

이 무렵부터 선교사뿐만이 아니라 조선(대한제국)인 교회 지도자도 기독교 학교를 설립했다. 1895년 조선 정부가 근대교육을 추진하려고 정부 안에 학부(學部, 오늘의 교육부)를 조직했다. 이때 서울의 새문안교회가 영신학당(永信學堂)을 세웠다. 전국의 교회들이 우후죽순 근대교육 기관인 기독교 학교를 설립했다. 교회 곁에 기독교 학교가 설립됐다. 또, 이제까지 학교 교육에서 제외된 여성의 교육을 위해 여자 학교도 설립됐다. 교회가 설립한 기독교 학교가 전국으로 확산 발전되면서 초등학교, 중등학교, 그리고 대학(평양 숭실대학)까지 세워졌다. 기독교 학교는 교회와 사회의 일꾼 양성에 주력했고 또 다음 세대의 교회를 준비했다.

장로교회 독노회 제2회(1908) 통계표. 1908년 당시 장로교회가 설립하여 운영한 전국의 기독교 학교 숫자가 집계되어 있다.
1908년 장로교회 독노회 제2회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 897개 교회의 60% 이상인 542개 교회가 소(초등)학교를 설립했다. 교회가 설립한 기독교 학교의 운영과 관리는 지역의 교회들이 분담했다. 1909년 장로교 총회(독노회)는 학교를 통괄하는 부서인 '학무국'을 설치했다. 5명의 위원으로 조직된 학무국은 전국 장로교회가 설립한 학교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제, 20세기 초반 기독교 학교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에서 전쟁했고, 그 결과 일본이 이겼다. 일본의 전쟁 승리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반복한 것이었고, 그만큼 충격이 컸다. 이와 함께 이제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하려는 야욕을 국제적으로 드러냈으니, 이에 온 나라가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 충격과 불안감으로 우리나라에서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이 일어났다. 학교 설립을 통한 인재 양성은 나라를 외세로부터 지켜내고 또 나라의 주권을 지켜내자는 운동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이듬해인 1905년에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을사조약'은 사회의 위기감을 일으켰다. 이에 교육구국운동이 애국계몽운동으로 진행됐다. 빼앗긴 국가 외교권을 되찾으려면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겠는데 그 힘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서 온다는 확신으로 애국계몽운동이 추진됐다. 전국적에서 사립학교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에 기독교 학교가 동참하며 선도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만세시위의 주동 세력은 장로교 소속 전국 21개 기독교 중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었다. 전국에 중학교는 남자학교 15개, 여자학교 6개로 총 21개였다. 중학교 학생 수는 1681명이었고, 교사 129명이었다. 그 결과, 가장 큰 피해를 중학교가 입었다. 중학교가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한 원인은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운 바를 실천한 것이었다. 학교 신앙교육의 핵심은 성경과 예배였다. 또 성경 교육의 핵심은 모세, 다윗, 에스더, 다니엘 등 성경의 인물들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인데, 이를 통해서 민족의식이 생성됐다. 학생들에게 성경의 인물들이 한국 민족의 지도자로 설정된 것이었다. 특히, 오산학교와 대성학교는 신앙교육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 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었다. 서울 경신학교는 근대 과학적 사고와 합리성을 가진 시민의식을 가르치고 대의민주주의 훈련을 시켰다. 배우고 훈련한 대의민주주의가 3.1운동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체제와 대립 충돌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교회를 향하기 전에 먼저 기독교 학교부터 시작됐다. 1935년 11월 14일 일제의 평안남도 지사 야스다께는 도내 중등학교 교장 회의를 소집해서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숭실중학교 교장 맥퀸을 비롯한 교장들이 이를 거절했다. 미국 장로교 북장로회 선교회도 또한 대책 회의를 통해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를 불응하는 학교 책임자를 교체하고 또 해당 학교도 폐교하겠다고 협박 공문을 보냈다. 결국, 야스다께는 숭실중학교 교장 인가를 취소했다. 또, 조선총독부는 이듬해인 1936년 1월 20일 평양 숭실전문대학 학장의 인가를 취소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의 위기로 내몰렸다.

기독교 학교 책임자들이 심각한 고민과 고뇌 속에 빠졌다.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서 학교 유지와 폐교 사이에서 장고에 돌입했다. 결국, 1937년 10월 29일 평양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가 학교를 폐교하겠다는 청원서를 당국에 제출했다. 선천의 신성중학교, 보성여학교, 강계의 영실중학교, 재령의 명신학교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십계명 제1계명을 위배하게 하는 심각한 도전이었다. 신사참배 거부는 우상숭배를 거절하는 신앙의 결단이었다.

1938년 2월까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경영하는 중학교 8개, 또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가 경영하는 10개 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폐교당했다. 그 다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교회와 교단 총회를 향해 마치 사람의 목에 칼을 겨누듯 나아갔다.

일제 강점기 고난의 나날 역사의 어둡고 캄캄한 시기가 마치 갑자기 동 터오는 새벽처럼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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