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주일예배'란 없다

'토요 주일예배'란 없다

[ 기고 ]

최영현 교수
2021년 01월 22일(금) 08:51
미증유의 전염병을 맞아 새로운 길과 방법을 찾는 이들이 많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신앙인의 실천에도 기존 전통과 가지 않은 길 사이에서 갈등하는 현상이 목도된다. 정부의 시책에 응하는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갖춰야 하는 성숙한 모습과 예배자로서 마땅히 지켜온 것들 사이에서의 고민이 깊다. 최근 예배당 좌석 중 20% 미만만 채울 수 있는 방역대책을 놓고 "토요 주일예배" 시행을 검토하는 교회가 점차 늘어나는 모양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주일을 지키기 어렵지만 그래도 교회를 찾아 예배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방법을 제시하려는 이런 목회적 돌봄을 무조건 경원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의 개념마저 흔들지도 모르는 시도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첫째, 부활의 의미를 되새길수록 주님의 날에 예배드리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부활은 기독교의 근본이다.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배려이고 인간의 방법과 상식을 깨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래서 기독교 초기부터 이 놀라운 사건에 감사하고 동참하는 의미에서 안식 후 첫날을 주님의 날, 주일로 정해 예배를 드렸다. 주일이 아닌 날을 주일인 것처럼 예배드림은 목회자의 어떤 선한 의도와 관계없이 부활보다 더욱 앞서는 어떤 가치가 있음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이 된다. 주일 예배에 관한 성경의 증언과 교회의 기록을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주님의 부활과 예배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기억할수록 주일 예배를 통해 부활의 의미를 드높임이 마땅하다.

둘째, 인간의 편의와 형편을 먼저 고려하지 않음이 우리의 헌신을 숭고하게 만들 것이다. 예배는 나의 삶을 바꾼다. 그것은 자신을 내어놓는 헌신을 통해서 가능하다. 예배는 자신을 내어놓으신 예수님과 인간의 헌신이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화합을 이루는 사건이다. 어떤 예배신학도 인간의 헌신을 배제할 수는 없다. 사실 예배를 위해서 우리가 간과해온 것이 있는데 예배를 주일에만 국한해 드리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모든 시간을 예배를 위해 사용해야 마땅하나 주일만 지킴으로 이미 모종의 타협을 해왔다. 우리 일상의 고단함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부족한 예배라도 받으셨을 것이지만, 우리가 먼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만족하는 것은 문제이다. 나 중심의 삶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미명으로 자행된다면, 그래서 주일을 위해 준비하고 헌신하기보다 내 생각과 계획에 더욱 적합한 시간을 찾아 예배한다면 그곳에서 이미 부족한 우리의 헌신이 그나마 더 퇴색할까 두렵다.

셋째, 전통은 시간의 검증을 거친 것이기에 충분한 숙고와 기도 후에 재구성함이 옳다. 초기교회부터 함께 시행한 원칙 중의 하나인 주일 예배는 이미 교단마다 헌법에 명시적으로 정착되었다. 핵심을 지키면서도 방법적인 변형을 꾀하는 것이 지혜니 필요에 따라 바꿀 수 있음을 주장한다면 전통을 지킬 때 얻게 되는 소중함을 먼저 충분히 검토함이 필요하다. 기도와 충분한 논의 없이 개별적인 실천이 앞선다면 교단의 헌법이 표방하는 한몸 된 교회는 요원하다. 특히 예배의 실천에 관한 사안은 헌법 정치원리 제2조가 말하는 "교회의 자유"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외에도 파편화된 현대사회를 치유할 교회의 공동체성과 교회마다 같은 시간에 예배를 드린다는 상징성도 이 혼란한 시절에 견지할 만한 소중한 가치라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나눠서 드릴 필요가 있다면 20%만 수용해야 할 때 다섯 번을 예배드리고, 10%만 수용해야 할 때 열 번을 드리는 방법을 먼저 고려함이 우선이라 생각한다. 토요일에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면 그 예배를 위해 수고하는 다른 지체들마저 토요일에 사역하게 만드는 점도 바람직하지 않다.

주님의 날을 지키기 위한 땀과 눈물은 여전히 값지고 아름답다. 그러나 사람의 편의를 위한 예배는 부활에 뿌리를 둔 교회의 성수주일 전통과 역사, 그리고 교리에 어긋나기에 수용하기 어렵다.

최영현 교수(한일장신대 예배·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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