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함께 사는 것 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가족이 함께 사는 것 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 아름다운세상 ] 가족의 이야기 담은 회고록 펴낸 이승규 장로

차유진 기자 echa@pckworld.com
2023년 05월 24일(수) 07:59
아버지 이태석 목사와 어머니 김송희 씨 사진 앞에서 밝게 웃고 있는 이승규 장로.
2010년 평양에서 네 명의 여동생을 만난 고 이승만 목사(가운데).
이승규 장로는 그 동안 동생들과 교환한 서신을 모두 보관하고 있다.
자녀와 손자들 사진 앞에 선 이승규 장로.
동생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이승규 장로.


【 대전 = 차유진 기자】 부모, 자녀, 스승 등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는 가정의 달 5월. 최근 자신의 가족사를 엮은 회고록 '기적과 신비- 90년 그 고난과 행복'을 출간한 이승규 장로(대덕교회)를 만났다. 올해 90세를 맞은 그는 미국장로교회(PCUSA) 총회장을 역임한 고 이승만 목사의 동생이다. 6.25전쟁 때 남하해 기적과 같은 삶을 살아간 형제의 이야기는 이미 10여 년 전 출간된 이승만 목사의 자서전 등을 통해서도 일부 알려진 바 있다.

가족의 신앙 역사는 1890년대 복음을 받아들인 할머니 김효신 권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 권사는 두 아들 군석과 태석을 모두 목사로 길러냈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 발발 4개월 만에 형제의 부친 이태석 목사가 순교하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이 후퇴한다는 소문까지 들려오자, 어머니 김송희 씨는 아들 마저 잃을 수 없다는 생각에 형제를 남한으로 피신시켰다.

"몸은 헤어져도 기도 속에서 만나자"며, 형제의 손을 꼭 잡아주신 것이 이 장로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형제는 1950년 12월 3일 평양을 떠나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공무원이던 지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대동강을 건넜고, 개성에선 화물차 뒤에 매달려 서울까지 이동했다. 서울에서 남한 부대에 편입된 형제는 12월 23일 경남 진해를 향한 행군을 시작했다. 이동중 교회에서 성탄예배를 드리며 살아 있음에 감사한 기억도 있지만, 일생에서 가장 춥고 배고픈 경험을 하게 될 그해 겨울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이듬해 1월 형제는 해병대 신병 모집에 지원한다. 난방조차 되지 않는 막사에서 4주의 훈련을 마치고 형 이승만 목사는 영어번역 특기자로 차출돼 해병학교 교재 번역을 하게 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스토리처럼 형 이승만 목사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동생 이승규 장로도 곧 번역과 인쇄 부서에서 일하게 된다. 전장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던 시기였기에 형제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라고 여기며 더 열심히 사명을 감당했다.

1952년 진해 해병학교에서 부산 해병대사령부로 발령받은 이 장로는 군목실에 소속돼 상이군인들의 직업교육을 담당했다. 이 장로는 군에 복무하며 고등학교 3학년 과정을 마쳐 졸업장을 취득했고, 이승만 목사는 미국 해병학교 연수자 선발 시험에 합격해 1953년 10월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여기까지가 1950년 전쟁이 시작돼 1953년 휴전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이승만 목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1956년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대학 입학원서에 해병대 건물 주소를 적어야 했고, 재정보증서류엔 첫 연수 때 함께 공부했던 미군 소위의 서명이 들어갔다. 이 목사는 생활비를 위해 하루에 4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던 중 한 교회에서 전쟁 경험을 간증했는데, 여기서 만난 미국 여성이 이 목사의 어머니가 돼 끝까지 학업을 후원해 주었다.

이 목사는 예일대 석사과정, 시카고 신학교 종교사회학 박사 과정 등을 마치고 1973년부터 미국장로교 세계선교부 중동지역 총무로 활동한다. 당시 이집트 북한 대사관을 통해 방북 허락을 받은 이 목사는 고향을 떠난지 28년 만에 4명의 여동생과 재회했다.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1980년 중동지역 총무에서 아시아 총무로 보직을 바꾼 이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서울 연지동의 미국 북장로교 부지 양도를 요청했을 때에도 1차로 부결된 안건을 재상정하고 설득하는 등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건축에 큰 도움을 줬다. 이 목사는 미국교회협의회 회장, 유니온신학교 교수 등을 거쳐, 2000년 미국장로교회의 첫 아시아 출신 총회장에 선출된다.

형이 미국 유학을 떠날 즈음 동생 이승규 장로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이 장로는 전쟁 전 평양에서 스승으로 만났던 김학수 화백과 남한에서도 함께 생활하며, 아버지로 모셨다. 또한 건강이 악화됐을 때 자신을 자녀처럼 돌봐 준 김성환 권사를 믿음의 어머니로 삼았다. 이 장로의 1957년 졸업사진에는 김학수 화백과 김성환 권사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후 이 장로는 국내 여러 기업에서 임원으로 활동하다, 1994년 대전 시립 장애인종합복지관장으로 취임해 섬김의 인생을 살았다.

어릴적 이 장로는 동생들을 위해 책을 만들어 주고, 교회 설교를 적어와 읽어주던 좋은 오빠였다. 기자와 만난 날 그는 오랜 만에 여동생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카세트 테이프를 틀었다. 이승만 목사가 방북했을 때 이 장로를 위해 녹음해 온 테이프였다.

15세 때 헤어진 첫째 동생 경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62세 노인이 돼 오빠에게 처음 인사를 올립니다. 세월이 흘러도 혈육의 정을 끊을 수 없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둘째 경옥도 "골목길에서 바래주면서 '한 주면 돌아온다'고 했는데 40년이 흘렀어요. 오빠들을 따라다니며 교회에서 찬양을 부르던 때가 그리워요…"라며 흐느낀다. 신앙이 좋았던 셋째 경주가 "아직도 믿음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용기로 얻고 있다"며, 사도신경을 외운다.

4명의 자매는 오빠 이승규 장로를 그리워하며 '구주 예수 의지함',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등 익숙한 찬양을 연이어 불렀다. 이 장로는 "어릴 적 오빠들에게 배운 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부르는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오빠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다며 통일의 그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미 나이가 많은 세 여동생은 세상을 떠났고, 막내 동생의 생사는 알지 못한다. 이 장로는 동생들과 주고 받은 266통의 서신을 모두 보관하고 있었다.

"형과 나는 신앙을 제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북한에 있었다면 살아 남기가 어려웠겠죠. 하지만 '어머니를 모시지 못했고, 그분께 행복을 드리지 못했다'는 비통함은 떨쳐 버리기 어렵습니다."

가족이 헤어져 사는 것 만큼 힘든 일이 없고, 가족이 함께 사는 것 만큼 행복한 일도 없다. 전쟁이 중단된 지 70년, 남북으로 헤어진 많은 가족들이 이제 그리운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이제 세 아들과 며느리를 두고 여러 손자들의 할아버지가 된 이승규 장로. "자녀들이 한 번도 내게 상처를 준 일이 없다"는 그는 "남한에서 만난 믿음의 부모들을 마음을 다해 모셨던 것이 이유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믿음의 부모들이 내게 주신 사랑 역시 친 자식을 향한 사랑보다 작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의 저서 '기적과 신비'는 친 부모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친 자녀보다 더한 사랑을 받았고, 다시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한 형제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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