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로고스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5

박영호 목사
2020년 01월 03일(금) 00:00
요한복음은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라는 말로 유려한 서문을 시작한다. '태초에'라는 말로 창세기를 상기시키며 "로고스"라는 말로 그레코-로만의 큰 세계에 접목한다. '로고스'라는 단어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근거, 호소, 견해, 기대, 말, 발화, 이성, 계시, 비율, 이야기'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철학에서도 워낙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요한이 어떤 의미를 차용하여 이 말을 썼는지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 출발은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찾아야 한다.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하던 에베소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오늘 발을 담근 물과 내일의 물은 다르다. 이렇듯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세상사가 일정한 규칙 없이 뒤죽박죽인 것 같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고차원적인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를 로고스라 불렀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보편적으로 타당한 생각은 로고스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말고, 로고스에 귀 기울이라"했다. 이런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로고스는 객관적 이론이라기 보다는 의인화하여 표현할 수 있는 무엇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다. 플라톤은 인생을 조악한 뗏목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건너가는 항해로 비유하면서 '어느 정도 신적인 로고스'라는 튼튼한 배를 타고 간다면 인생항해가 훨씬 안전할 것이라는 비유를 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에서 연설을 설득력있게 만드는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를 들면서 로고스의 실용적인 면을 강조한다. 인간의 개인적인 생각에 보편타당한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이 로고스이다. 동물과 구별되는, 노예와도 구별되는 주체적이고 이성적인 인간만의 특질이라 할 수 있다. 스토아 학파는 세계를 작동하게 하는 원리로 로고스를 이해했다. 헤겔 등의 현대철학자들이 말하는 '세계이성'도 이에 맞닿아 있다. 이렇게 쓰이는 로고스의 히브리어 상응어는 '호크마(지혜)'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지혜'에서 로고스의 배경을 찾는 것은 타당한 방향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지혜는 요한복음의 로고스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3:20),"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잠 8:1~2)"는 등 사람들을 권면하고 초청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이런 표현은 문학적 의미에서 의인화라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언어 습관 속에서 지혜가 인격적 주체로 인식되어져 가는 과정을 그려 볼 수 있다 (지혜서 8:1, 집회서 24:1~2)고 한다. 지혜가 창조의 맥락에서 등장한다는 점은 요한복음과의 관련성을 더 짙게 만든다(잠언 3:19). 그러나 로고스가 남성 명사인 반면에 지혜(소피아)는 여성 명사라는 사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한 바울과는 달리 요한복음에는 지혜라는 말이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른 배경을 찾게 만든다. 이 대목에서 '다바르(말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창 1; 시 33:6).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는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대리자로서의 말씀을 생각하게 한다(참조, 사 9:8). '지혜'와 '말씀' 둘 다 요한복음의 로고스의 개념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본다면, 요한이 이 둘을 결합했을 가능성보다 요한 이전에 이미 유대의 전통에서 구약의 지혜와 말씀, 그리고 헬라철학의 로고스 개념이 다양하게 결합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합리적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철학자 필론을 들 수 있다. 필론은 '하나님의 로고스'라는 말을 성경, 토라, 하나님의 말씀, 또는 '인간에게 현현하여 계시하는 하나님' 등을 가리킬 때 종종 사용한다. 필론은 세계를 불완전한 물질세계와 완전한 정신세계로 구분했다. 이 두 세계의 차이는 심대하기 때문에 중재적 존재들이 필요한데, 그 가운데 최고의 존재가 로고스라고 했다. '처음 나신 자' 같은 표현도 쓰며, 구약에 나오는 천사를 로고스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창조의 과정에서도 등장하지만, 이 로고스는 선재하시는 하나님 보다는 플라톤의 데미우르지에 가깝다. 헬라적 유대교의 대표주자로 볼 수 있는 필론은 자신의 과제를 유대종교의 탁월성을 헬라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그 결과는 플라톤적 철학을 유대적 언어로 표현한 정도라는 혐의가 짙다. 많은 현대신학이 철학을 차용하면서, 그 철학에 포섭되는 현상과 유비를 이룬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창조를 강하게 연상시키며, 물질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을 선명하게 내세우는(1:14), 그러면서 헬라철학의 풍부한 로고스 개념을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요한은 필론의 과제를 실제로 달성해낸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유대종교가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지점은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핵심이다. 필론과 당대 많은 유대인들이 최고의 중재자로 내세운 모세와의 비교가 요한에게 중요했던 것이 바로 이 이유에서였다(1:16~18). 요약하자면, 헬라철학과 유대전통의 어떤 한 개념도 요한복음의 로고스개념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요한은 이 넓은 사상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재료들로 그만의 독창적인 로고스론을 펼쳤다. 그 독창성의 근원은 요한의 천재성보다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모노게네스(유일하신 분)의 유일성에서 연유한다 해야 할 것이다.

박영호 목사/포항제일교회·전 한일장신대 신약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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