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말씀)가 옥토를 만드니, 씨를 계속 뿌려라(막 4:1-20)-하-

씨(말씀)가 옥토를 만드니, 씨를 계속 뿌려라(막 4:1-20)-하-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예수님의 비유 연구 2

류호성 교수
2020년 07월 17일(금) 00:00
<이어짐> 이런 이해에 문제를 제기하는 자들은, 농부가 씨 하나를 뿌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며 또한 씨 하나를 뿌렸으면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4절)라는 표현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곧 여러 마리의 '새들'이 날라와서 씨 하나를 먹었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만든 것은 마가의 실수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말을 포함하여 (영어권이나 독일어권 등등) 번역과 그렇게 설명한 해석자들에게 있다. 마가는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라는 것을 헬라어로 '카이 엘텐 타 페테이나 카이 카테파겐 아우토'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마가는 '먹어 버렸다'라는 동사를 '3인칭, 단수, 과거시제'로 표현하였다. 이 문장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그리고 새들이 날라왔습니다. 그런데 (이것들 중) 한 마리가 그것(씨)을 먹어 버렸다'이다. 곧 새들이 씨 하나를 먹은 것이 아니라, 날아온 새들 중 한 마리가 뿌려진 씨 하나를 먹은 것이다. 이렇게 마가는 결실하지 못한 밭과 결실한 밭이 하나임을 표현하기 위해 섬세한 표현을 했다.

결실하지 못한 세 종류의 밭에는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곧 길가는 새들 때문에, 돌밭은 흙이 깊지 못해 그리고 가시떨기 밭은 가시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땅은 어떻게 해서 좋은 땅이 되었는지 설명되지 않고 있다. "땅을 기경하니 좋은 땅이 되었다"라는 표현이 이 비유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좋은 땅이 되었는가? 그것은 농부가 결실하지 못한 밭에 씨를 계속 뿌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밭에서 씨가 죽고 죽어서 옥토가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라고 말씀하셨다.

3. 10~12절은 비유를 사용한 목적이 설명되어 있다. 문제는 이사야 6장 9~10절을 인용해서 외인들에게 비유로 설명해서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게 해서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한다'라는데 있다.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 당혹해 한다. 그런데 먼저 이 구절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곧 관심의 초점이 외부인이 아닌, 내부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자들의 특권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둘째, 예수님은 모든 자들에게 비유로 알아 들을 수 있도록 가르치셨다(32절).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로(막 3:6),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다. 셋째, 이 표현은 14~20절에서 비유를 설명하는 고리 역할을 한다.

4. 14~20절은 비유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우리는 길가나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 밭을 가진 자들은 왜 말씀에 결실을 맺지 못했는가 질문할 수 있다. 곧 사탄으로부터 왜 뿌려진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빼앗긴 것인가? 또한 환난이나 박해 그리고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부터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였는가? 그 이유는 이들이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나타내기 위해 마가는, 말씀은 '현재 시제'에 뿌려지고 있고, 듣는 것은 '과거 시제'로 표현한다. 곧 14절에서 '뿌린다'라는 동사 '스페레이'로 현재시제, 3인칭 단수 동사가 사용되었다. 15절에서 우리말은 '길 가에 뿌리웠다'라고 과거형으로 표현되었지만, 여기에는 현재 시제로 3인칭 단수 동사 수동태인 '스페이레타이'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들었을 때에'는 단순과거, 3인칭 복수 동사 '아쿠소신'이 사용되었다.

16절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우리말로 15절처럼 과거형으로 표현되었지만, 여기서는 '스페이로메노이'라는 현재 분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에'는 우리말로는 현재 시제로 표현되었지만, 15절과 동일하게 과거 시제인 '아쿠소신' 동사가 사용되었다. 18절에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에서 '뿌려진'을 의미하는 것은 현재 시제이고, 말씀을 '듣기는 하되'는 과거 시제이다.

그러나 20절에서는 동사의 시제가 서로 바뀌어서 나타난다. 곧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에서는 단순과거 수동형 분사 '스파렌테스'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아쿠오신) 받아(파라데콘타이) … 결실하는(카르포포루신)' 표현에서는 모두 현재 시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곧 좋은 땅은 이미 뿌려진 말씀을 매일 듣기에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다.

5. 결국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좋은 땅은 씨, 곧 말씀이 만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그래서 씨를 계속해서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사탄과 환난과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말씀을 매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140년 전의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면 이 비유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복음의 불모지에 무수히 많은 씨뿌리는 자들이 이 땅에 씨를 뿌렸기에, 우리의 믿음의 토양이 바뀐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는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하고, 그것을 매일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듣지 않는 가정, 교회 그리고 신학대학교는 좋은 땅이 아니기에 결실하지 못하기에, 때가 되면 불살라질 것이다.

류호성 교수/서울장신대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