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라: 등불 비유와 헤아림의 격언(막 4:21-25)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라: 등불 비유와 헤아림의 격언(막 4:21-25)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예수님의 비유 연구 3  

류호성 교수
2020년 07월 24일(금) 00:00
마가복음 4장 21~25절을 논의하기 이전에 '비유 해석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1888년 독일의 신학자 아돌프 율리허가 '예수님의 비유'(Die Gleichnisreden Jesu)를 발표하기 이전까지 비유는 알레고리적 방법으로 해석되었다. 예를 들면 어거스틴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눅 10:25~37)에서 강도를 '사탄과 원수들'로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을 '그리스도'로 해석한 것처럼, 단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빗대어 암시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율리허는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셨고, 이것을 초기 교회가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했다는(예를 들면, 막 4:13~20) 전제 위에 비유와 알레고리를 구분한다. 그래서 그는 비유 연구에서 알레고리적 해석을 배격한다. 그리고 각 비유의 이미지와 실체 사이에는 '하나의 비교점'만 있음을 강조하면서, 비유가 제시하는 도덕적 교훈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율리허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비유를 예수님의 생애와 연관시켜 역사적 해석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비유에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된 (그리고 실현하고 있는) 종말론적 희망'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C. H. 다드, J. 예레미아스).

반면 비유를 문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자들은 비유와 알레고리의 이분법적 구분을 배격한다. 그리고 비유에는 알레고리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에 '여러 비교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비유를 역동적인 '언어 사건' 속에서 해석하거나(E. 푹스, E. 융엘), 또는 자율적인 미적 대상으로 해석한다(R. 펑크, D. O. 비아, B. 스캇). 더 나아가서는 비유를 중동의 문화적 환경이나(K. 베일리) 해방이라는 사회사적 관점으로 해석한다(W. 헤르조그).

4장 21~25절의 단락은 '들음'을 강조하는(23~24a절) 내용을 두고 등불 비유(21~22절)와 헤아림에 대한 격언 말씀(24b~25절)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런데 등불 비유와 헤아림의 격언 말씀은 마태복음(5:15, 7:2)과 누가복음(8:16~18, 11:33)에 각기 다른 문맥 속에서 나타나기에,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정황 속에서 말씀하신 것을 마가가 결합시켜 놓은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마가의 이런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보낸다. 왜냐하면 21~25절이 없으면 앞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설명(14~20절)과 바로 뒤에 언급되는 '씨 뿌리는 비유'(26~29절)가 자연스럽게 서로 연결되는데, 21~25절의 내용은 앞뒤의 '씨'의 이야기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등불의 비유에서, 우리말 성경은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21)으로 번역했지만, 사실 이 문장의 주어가 '등불'(호 루크노스)이고, '가져오다'라는 말은 '오다'를 뜻하는 동사 중간태 '에르케타이'가 사용된 점을 착안해서, 등불은 예수님 자신 아니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것으로, 이렇게 숨겨진 것들이 스스로 '옴'을 통해 세상에 곧 드러날 것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등불은 등경 위에 놓여 빛을 발해 숨겨진 것을 밝히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아림에 대한 격언은 듣는 내용 또는 태도와 관련된 것으로, 여하튼 잘 들으면 결실을 맺어 더욱 축복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가진 것도 빼앗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아림의 격언을 앞의 등불 비유와는 연관시키지 않는다.

등불 비유와 헤아림의 격언에 대한 학자들의 이런 견해들은 그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21~25절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해석'(14~20절) 바로 뒤에 나온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과 연관해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글은 문장의 흐름 속에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마가는 14~20절에서 결실을 맺지 못하는 땅과 맺는 땅의 차이점은 '말씀을 매일 듣는 태도'와 관련 있다고 말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21~22절을 바라보면, 이 구절들은 14~20절의 비유에 대한 마가의 해석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등불의 존재가 말(됫박)이나 평상(침상) 아래에 오지 않고 등경 위로 와서 사방에 빛을 비추어, 숨겨 둔 것은 드러내고 감추인 것은 나타내게 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처럼, 땅의 결실은 말씀의 들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결국 등불이 빛을 발하는 것처럼, 결실하는 믿음은 말씀의 들음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그래서 '등불'은 다른 무엇을 상징하는 것보다는, 사물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한 헤아림과 관련한 격언도 14~20절과 연관해서 '들음'과 연관성을 맺는다. 먼저 들음의 '태도'를 바르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24a절의 '삼가다'라는 동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말 '삼가다'는 '보다'를 뜻하는 복수 명령형 '브레페테'를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직역하자면 "너희가 듣는 것이 무엇인지 보라"는 것이다. 그만큼 들음에 주의하라는 것이다.

또한 들음의 '내용'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24b절은 곡식을 거래하면서 계약할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용어이다. 우리말은 새번역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만큼 너희에게 되질하여 주실 것이요, 덤으로 더 주실 것이다"가 본래적 의미이다. 이것은 신명기 25장 15절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참고, 잠 20:10)라는 말씀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 곧 곡물을 거래할 때에 공정한 되를 사용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니 그 말씀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되새기며, 그렇게 거래하라는 것이다.

마가는 등불 비유와 헤아림의 격언을 23~24a절로 묶으면서, '듣다'라는 동사를 3번이나 사용한다. 결국 21~22절은 등불이 빛을 비춰 모든 것을 밝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곡물 거래를 할 때 공정한 되를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기에, 그 말씀을 늘 간직하라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14~20절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기에, 우리는 항상 그리고 가슴으로 그것을 들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사망으로 옮겨질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막는 어두운 세력들을 늘 경계해야 한다.

류호성 교수/서울장신대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