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과 부패한 것들에 대한 심판(막 12:1~12)

탐욕과 부패한 것들에 대한 심판(막 12:1~12)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 5

류호성 교수
2020년 08월 14일(금) 00:00
소위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의를 불러일으킨 비유 중 하나이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첫째는 자료의 문제이다. 곧 이 비유가 마태복음(21:33~46)과 누가복음(20:9~19) 그리고 도마복음(65장)에도 보도되기에, 어떤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초기 형태의 자료냐는 것이다. '짧은 이야기가 더 초기의 형태'라는 전제 위에서 짧은 도마복음이 최초의 자료라고 주장됐다. 그러나 세밀한 연구결과 도마복음은 누가복음의 것을 축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자료설에 따라 이 비유를 처음 보도한 마가복음 자료가 가장 초기의 형태임이 밝혀졌다.

둘째는 장르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비유'만 말씀하셨고 '알레고리적 해석'은 초대 교회가 덧붙인 것이라는 아돌프 율리허(1857~1938)의 전제에 따라, 이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원 주인, 악한 농부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은 다른 무엇을 의미하지 않고 그 자체라는 것이다. 곧 하나님,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리허의 전제는 오늘날 비유 연구에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의 마샬(비유)에는 알레고리적 해석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한 예는 포도원을 이스라엘로 그리고 주인을 하나님으로 알레고리 해석한 이사야의 포도원의 노래(5:1~7)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 비유를 들으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악한 농부들을 자신들이라고 생각한 것을 보면(막 11:27, 12:12), 이 비유 속에는 알레고리적 해석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

셋째는 사회적 배경에 관한 것이다. 이 비유는 1세기 당시 팔레스타인의 악덕 지주에 대해 저항하는 농민들의 반란을 배경으로, 젤롯당의 폭력적인 투쟁 방법을 비판하거나 아니면 그와 정반대로 농민들의 폭력적인 방법을 정당화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해석은 본문으로부터 너무 떨어진 해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을 두고 그 권위에 대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과 이에 대해 요한의 세례를 근거로한 예수님의 반문(11:27~33), 바로 이어서 나타난다. 결국 성전 청결에 대한 권위와 관련된 것이다. 이 비유는 내용상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포도원 주인(하나님)의 너그러움이다. 주인은 친히 포도원을 만든다(1). 여기서 '만들다'를 뜻하는 동사 '퓌튜오'는 하나님이 에덴동산(LXX 창 2:8)과 이스라엘을 위해 포도원을 건설하실 때에도 사용된(LXX 사 5:2) 단어이다. 그런데 주인은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데 불편함을 덜어주고자 힘써 노력한다. 그래서 도둑이나 짐승들의 침입을 막고 감시하기 편하도록 울타리를 두르고 망대도 세운다. 그리고 세를 준다. 그런데 그가 세를 준 사람들은 소규모의 소작농이 아니라, 대규모 농사를 짓는 부유한 영농인들이다. 그것은 주인이 '즙 짜는 틀(휘폴레니온)'을 만들어 놓은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 포도주 틀을 만드셨다, 참고 사 5:2). 만약 소규모 포도 농사를 했다면, 마을에 있는 공동의 포도주 틀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를 주다(에크디도미)'라는 동사는 대규모 자본을 투자하고 보상을 기대하는 상업적 거래를 뜻한다.

주인은 세를 주고 포도를 수확할 '때가 이르매'(2), 대략 4~5년(레 19:24~25)의 시간이 지난 다음 소출의 '얼마'를 받고자(2) 종(예언자)을 보낸다. 그러나 그 종은 탐욕스러운 농부들로부터 매를 맞고 빈손으로 돌아온다. 이에 주인은 3차례나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허사였다(3~5). 그들 중 일부는 죽임을 당하였다. 탐욕스러운 농부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마 23:37, 눅 13:34)들이었다. 그럼에도 주인이 종들을 계속해서 보낸 것은, 그가 미련하거나 또한 소출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사람들을,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존대하는(엔트레페인)' 방법을 가르치고자 함이다. 곧 탐욕스러운 농부들에게 회개와 겸손한 마음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둘째는 부유한 농부(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교만과 탐욕이다. 이들의 악행은 점차 극대화되어 간다. 처음에는 주인이 보낸 종을 '때려서' 보냈지만, 다음에는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을 했으며, 그 다음에는 '죽이기'까지 한다(3~5). 더 나아가서는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진다'(8). 곧 그들은 적은 소작료를 거부하는 것으로 악행을 시작했지만, 교만과 탐욕이 점차 커져서 포도원을 차지할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차지하고자 주인의 아들(상속인)을 죽이는 악행까지 저지른다. 이들의 행동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주인이 되고자 선악과를 먹은 것 또한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고자 악을 저지른 것과 유사하다. 결국 주인은 그들의 교만과 탐욕에 대해 진멸로 심판한다(9). 그리고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 곧 겸손하고 순결한 자들에게 넘겨 준다.

셋째는 사랑하는 아들(예수님, 1:11, 9:7)의 죽음과 모퉁이 돌(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암시이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죽임을 당해 포도원 밖으로 내던져지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8). 그것은 부패한 권력에 맞선 세례 요한의 죽음을 통해서, 이미 예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건축가인 종교 지도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죽임당한) 돌이지만,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살리셔서 구원의 '모퉁이 돌'(참고, 시 118:22, 벧전 2:7)이 되게 하실 것을 알고 계셨다. 곧 자신이 부활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놀랍게도 말이다(11).

결국 이 비유는 하나님이 만드신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악행을 일삼고, 급기야 그의 사랑하는 아들까지 죽이는 탐욕스러운 부유한 농부들과 그리고 그들의 또 다른 얼굴로 하나님 섬김을 가로막는 부패한 지도자들의 권력욕을 하나님은 때가 되면 심판하시고, 그 포도원을 회개하는 겸손한 자들에게 넘겨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확증하고자 그의 아들이 부활의 모퉁이 돌이 되신다는 것이다.

류호성 교수/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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