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과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36-43)

밀과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36-43)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9 선과 악은 공존하지만, 하나님은 악을 반드시 심판하신다

류호성 교수
2020년 09월 11일(금) 08:53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선(한자)과 악(한자)에 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비유이다. 먼저 자료적 특징을 살펴보자. 마태는 마가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막 4:26~29)를 삭제하고, 그 대신 복음서 기자 중에서 유일하게 이 비유를 보도한다. 또한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더불어 비유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갖고 있다. 이를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마태가 마가의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를 토대로 또는 여기에 알곡과 쭉정이에 관한 말씀(마 3:12)을 첨가해서 이 비유를 창작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선포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여전히 그리스도인들도 있고 또한 비그리스도인들도 있는 현실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일부 학자들은 비유 자체는 예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이고, 비유에 대한 해석은 마태 교회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곧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인내를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열심당원들은 독립을 위해 로마인들을 쫓아내고자, 또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나타내고자 죄인들을 구별하는데 바빴다. 그리고 쿰란공동체도 자신들을 불의한 자들과 구별시키는데만 힘썼다. 심지어 제자들 중에서도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믿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태워 버릴 것을 요구했다(눅 9:52~56). 이에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의 때는 다가오고 있으며 또한 그런 구별 작업은 종이 아닌 추수꾼의 일이기에, 지금은 그런 작업을 할 때가 아님을 가르치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런데 마태 교회는 이방인들이 들어오면서 크게 확장되었다. 그런 가운데 교회 내에 믿음 생활을 잘하는 의인들이 늘어나는 반면, 그 반대로 불법을 행하는 악한 자들도 늘어나 서로 혼합하게 되었다. 이에 마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권고하고자 심판에 초점을 두고 비유에 대해 해석을 첨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료에 대한 설명은 비유 이면에 대한 논의이기에, 사실상 추상적이고 허구적인 경향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는 비유의 내용과 농사법에 관한 것이다. 비유의 내용처럼 당시 고대 중동에서는 밀밭에 원수가 몰래 와서 가라지를 뿌리는 일이 있었으며, 그것은 원수에 대한 보복의 수단으로 사용됐다. 밀과 가라지가 이삭을 맺기 전에 유사하다는 점을 악용했다. 그래서 로마법은 그러한 자들을 징역형으로 다스렸다. 하지만 종들이 밀밭에 있는 가라지를 뽑고자 할 때, 주인이 금지한 것과(28절) 또한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 불사르는 것은(30b절) 당시 농사법과 일치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주인은 가라지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삭을 맺기 전에 가라지를 자주 뽑아냈고, 또한 밀을 먼저 추수하고 나서 가라지를 묶어 땔감으로 사용했다.

당시의 농사법과 다른 점이 바로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이다. 먼저 주인이 가라지 뽑는 것을 종들에게 금한 것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 밀)까지 뽑을까 염려했기"(29절) 때문이다. 주인은 밀과 가라지가 너무 비슷하기에, 종들이 구분할 수 없을 것 같아 염려한 것이 아니다. 종들은 밀과 가라지를 확실히 구분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결실할 때"(카르폰 에포이에센, 26절)이기에, 가라지가 밀보다 훨씬 크고 색깔도 짙기에 눈으로는 금방 식별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가라지의 뿌리가 밀의 뿌리보다 강하고 더 깊게 자라고 둘이 뒤엉켜 있어 가라지를 뽑다가 밀도 함께 뽑힐 수 있기에 금지한 것이다. 말하자면 밀(=의인)을 보호하고자 가라지(=악한자)를 그대로 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분은 마지막 때에, 종이 아닌 추수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밀보다도 가라지를 먼저 추수한 것은, 그만큼 가라지가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주인은 밭에 "좋은 씨를"(칼론 스페르마-단수) 뿌렸지만(24절), 원수는 "가라지[들]를"(지자니아-복수) 뿌렸다(25절). 물론 원수가 "곡식 가운데[사이에]"(아나 메손 투 시투) 가라지를 뿌렸기 때문에, 주인도 밭에 많은 밀을 뿌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 '가라지'가 전부 복수형으로 사용한 것은, 그만큼 가라지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신학 사상과도 일치한다. 곧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가라지는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의인들은 적다는 것이다(마 7:13~14). 곧 회개하는 자들이 적다는 것이다(마 11:20). 그리고 가라지를 먼저 추수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악한 자들을 마지막 때에는 반드시 심판한다는 것이다(마 25장).

셋째는 이 비유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이다. 융학파에서는 밀과 가라지를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대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밀과 가라지는 마지막 때나 분리가능하고, 그전까지는 서로 마주 보며 공존한다는 것이다. 특히 가라지는 개인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로, 한 개인이 온전히 성숙하려면 그 그림자를 무시하지 말고, 고통스럽지만 바로 보도록 평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그림자는 좋건 싫건 함께 가는 동행인이며, 때로는 져주는 척하면서, 때로는 저항하면서, 때로는 다독거리면서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 그림자를 무시하면, 적대적인 힘이 되어 때로는 삶을 파멸로 이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을 밀(= 의인)이고,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은 가라지(= 악한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 가라지가 심판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라지를 마지막 심판의 때에 불사르지만, 그전까지는 가라지를 그냥 놔두신다. 그것은 자신을 밀이라고 생각하는 자를 위해서다.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가라지를 통해 믿음의 훈련을 계속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류호성 교수/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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