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마 18:23~35)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마 18:23~35)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10 십자가의 은혜가 가슴에 새겨질 때에만 가능한 것, 용서!

류호성 교수
2020년 09월 18일(금) 09:00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는 미움이라는 실체를 용서의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비유이다. 먼저 이 비유의 진정성에 대해 살펴보자. 일부 학자들은 이 비유가 마태복음에만 나타난다는 점, 그리고 아내와 자식들을 매매하는 것(18:25)과 빚 때문에 옥에 갇힌 사람을 고문하는(18:34) 것이 이방적 색채이기에, 예수님의 전승이라기보다는 마태가 창작한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마태가 용서를 강조하고자 주기도문(6:12, 14~15)과 또한 용서의 횟수를 묻는 베드로의 질문(18:21~22)을 근거로 이 비유를 창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빚 때문에 가족을 파는 것은 이방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 사회에도 있는 일이었다(레 25:39; 느 5:5; 사 50:1). 또한 옥졸이 사람을 고문하는 것도 유대 사회라고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다. 헤롯 왕은 죄수들을 직접 고문하면서 심문했는데, 하물며 옥졸들이 죄인들을 때리고 고문하는 일은 지극히 가능한 것이다(참고, 행 22:24). 그리고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용서할 것을 강조했기에, 그가 여러 비유로 제자들에게 용서를 가르쳤고(참고, 눅 7:36~50), 그중에 하나가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이 비유가 '천국'과 관련된 것이고, 등장하는 임금이 그의 종들과 '결산'을 한다는 것이다(23절). 결산은 종말의 심판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결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쉬나라이 로곤'으로 관용어가 사용되었다. 여기서 '로곤'은 '로고스'의 대격인데, 이 '로고스'를 요한복음 1:1의 '로고스'의 의미와 연관해서 이 관용어를 '로고스를 결산하다' 더 나아가서 '진리를 결산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안 된다.

둘째는 24절로, 이 구절의 헬라어 문장을 우리말로 가장 잘 번역한 것은 '새번역'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이다. 여기서 종은 '끌려왔다'(프로세넥스테-수동태).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종이 23절의 결산을 통해서 빚을 많이 졌기에, 이미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종이 빚진 액수는 '일만 달란트'로, 당시 노동자의 자그마치 15만 년에 해당하는 임금이다. 아주 엄청난 돈이다. 당시 헤롯 왕의 1년 세수가 900 달란트였으니(유대고대사, 17:317-320), 거의 11년 동안 세금을 거둬들여 모아야 할 큰 돈이다.

그런데 BC 63년 폼페이우스가 유대를 멸망시키고, 그들로부터 단시일 내에 배상금으로 '일만 달란트'를 빼앗아 갔다(유대고대사, 14:78). 이것을 통해 우리는 다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종은 다름 아닌 로마 제국의 통치자이고, 임금은 바로 하늘 아버지이다(35절). 결국 하늘 아버지가 회개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계속 침략하는, 특히 유대 민족을 억압하는 로마 제국을 영원히 심판한다는 것이다(물론 이런 해석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 비유의 본래적 의미로부터 동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필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신학적 상상력을 불어 넣고자 이런 해석을 해 보았다).

셋째는 24~27절에 등장하는 임금의 이미지이다. 혹자는 24~26절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종에게 빚진 액수를 갚으라고 심판하는 임금의 이미지와 27절에서 그 종을 불쌍히 여겨 용서하는 임금의 이미지가 너무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24~26절에 나타난 임금의 이미지는 하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로마 제국 통치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한(시 86:15) 사랑의 하나님이시다(요일 4:8).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불의에 대해 진노하시며, 그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시 50:6). 물론 그 심판을 거두실 때는 빚진 종이 "엎드려 절하며"(26절) 회개할 때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해에 대해 쏠림 현상이 있다. 특히 '이신칭의'의 개념을 갖고 사랑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고정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탈과 탈법을 해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비유가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이신칭의'로 죄를 용서받은 자는, 그 은혜의 대가로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가 그러한 자를 '악한 종'(32절)이라고 부르고, 그가 빚을 갚을 때까지, 곧 용서할 때까지 옥졸에게 넘긴다는 것이다(34절).

넷째는 이 비유의 의미와 우리의 삶과의 연관성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라는 것이다(35절).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일만 달란트나 되는 죄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일상의 삶을 동반하면서 미운 감정이 있는 형제자매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런 갈등 속에 처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용서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정의가 세워지지 않는 것 같고, 그렇다고 미워하자니 용서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가슴 속에 울려 퍼지고! 죽기보다 힘든 용서!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이런 갈등의 해결은 결국 십자가의 은혜가 마음속에 충만할 때에만 가능하다.

류호성 교수/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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