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심판 기준은 '행함' 아닌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지혜이다

최후의 심판 기준은 '행함' 아닌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지혜이다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13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예수님의 최후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마 25:31-46)

류호성 교수
2020년 10월 16일(금) 10:47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 시에 일어나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비유의 논의를 살펴보면 첫째, 자료에 관한 것이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보도되는 특수 자료로, 그 내용 또한 유대의 랍비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 그래서 혹자는 마태 또는 그의 교회가 종말론적 심판에 관한 단편 자료들을 수집해서 창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선포하신 내용이 종말론적 심판에 관한 것이고(참고, 마 4:17; 7:19), 양과 염소의 이미지는 흔한 것이기에 이 비유는 예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본문에서 "인자"(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 31절)가 "임금"(호 바실류스, 34, 40, 45절)으로 바뀌고, 또한 마태의 용어인 "그 때에"(토테, 34, 37, 41, 44, 45절), "내 아버지께"(46절)가 빈번히 사용된 것으로 보아, 마태가 예수님의 전승을 기독론적으로 편집했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마태가 24~25장에서 '성전 파괴와 세상 종말'을 언급하면서, 재림을 통한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무화과나무 비유'(24:32~41), '종의 비유'(24:45~51), '열 처녀 비유'(25:1~13) 그리고 '달란트 비유'(25:14~30)를 연속적으로 배열해 놓고, 그 마지막에 '양과 염소의 비유'를 편집해 놓은 것은, 심판 사상을 강조하고자 하는 그의 신학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32a절의 "모든 민족을"(판타 타 에트네)에 대한 논의이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하면 크게 다섯 가지 방향이다. 곧 ① 모든 사람, ② 모든 기독교인, ③ 모든 비기독교인과 비유대인, ④ 모든 비기독교인 그리고 ⑤ 모든 비유대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비유가 세상 마지막 심판이라는 점과 또한 예수님이 28:19절에서 "모든 민족을"(판타 타 에트네)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신 것과 동일한 어구라는 점을 생각하면, '모든 민족'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셋째, 양(오른쪽)과 염소(왼쪽)의 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혹자는 유월절에 '양'뿐만 아니라 '염소'(출 12:5)도 사용되고 또한 지혜로운 목동이라면 '양과 염소'를 함께 키우기에, '염소'를 부정적인 평가를 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자'를 상징하는 점에 대해 의아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염소가 대속죄일에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광야로 떠나가는 '아사셀'(레 16:8, 10)로 그리고 족장과 백성들의 죄와 허물로 인한 속죄제(참고, 레 4:23, 28)의 '수치'의 제물로 사용된 점을 기억하면, 이 비유에서 상징하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양은 명예를, 염소는 수치를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오른쪽과 왼쪽의 의미도 동일하다. 일반적으로 오른쪽은 존귀, 위엄 그리고 영광을 뜻하는 명예로운 자리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것으로 말한다(막 16:19; 엡 1:20). 반면 왼쪽은 저주, 사망, 기만 또는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불명예스러운 자리이다. 이러한 점은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나타내기 위해 390일 동안 왼편으로 누운 것(겔 4:4)에 잘 나타난다. 명예와 수치에 대한 오른쪽과 왼쪽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전 10:2)에 잘 나타난다.

넷째, 이 비유의 핵심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내 형제(들) 중에 지극히 작은자(들) 하나에게"(헤니 투톤 톤 아델폰 무 톤 엘라키스톤, 40b)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은 ①궁핍한 모든 사람, ②모든 그리스도인, ③기독교 선교사, ④유대 그리스도인, ⑤환란의 때 순교자들 그리고 ⑥교회라고 주장한다. 마태 교회가 선교하는 공동체임을 주장하는 자들은(참고, 10:5~6; 28:19~20)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은 그들이 공동체 내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내 형제"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 내지는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형제'라는 단어는 보편적이며 포괄성이 들어 있다는 점, 그리고 교회를 상징하는 단수의 '내 형제'(무 아델포스, 마 12:50)가 아닌 복수의 "내 형제들"이 사용된 점, 또한 '모든 민족'을 심판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극히 작은 자들'은 '궁핍한 모든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끝으로, 이 비유에 대한 주제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행함'에 초점을 둔다. 그래서 선한 행실을 하는 자는 영생의 축복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아니한 자는 영벌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이 비유를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왼편에 있는 자들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44절)라고 강력히 항의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들의 항의 속에는 자신들도 그런 선한 행실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45절)라고 답변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그들의 행위 기준이 크게 잘못되었고 지적한 것이다. 곧 왼편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행동했지, 하나님(예수님)의 뜻을 살피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오른쪽에 있는 자들은 일상의 삶에서 그분의 뜻을 살핀 자들이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토 텔레마 투 파트로스 무)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고, 그 사랑의 형태가 마태에서 '용서, 구제, 섬김, 회개'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 비유의 주제는 착한 행실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지혜'라고 보아야 한다. 미련한 자는 가기 뜻대로 행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한다. 그래서 이 비유는 최후의 심판에서 그 기준은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지혜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기에 이 비유는 '이신칭의' 사상과 충돌되지 않는다.

류호성 교수/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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