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 세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 세대'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21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마 11:16-19; 눅 7:31-35)

류호성 교수
2020년 12월 18일(금) 09:36
이 비유는 예수님이 자신을 유일하게 세례 요한과 직접 연결시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 세대의 사람들을 혹독하게 비판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 비유의 몇몇 주제들은 학자들 사이에서 팽팽한 의견 대립이 있다. 살펴보면 첫째, 자료에 대한 논의로, 두 가지가 주요 쟁점이 있다.

① 이 Q 자료가 복합적인 자료들의 결합인가, 아니면 하나의 통일된 자료인가 하는 점이다. 복합적인 자료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마 11:16~17; 눅 7:31~32)와 그에 대한 설명인 귀신들렸다는 세례 요한과 먹보요 술꾼이라는 예수의 이야기(마 11:18~19a; 눅 7:33~34)가 별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비유에 대한 설명은 초대 교회가 비유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여 덧붙인 것이며 또한 '인자'와 '지혜'(마 11:19; 눅 7:35)라는 단어도 초대 교회의 신학이 반영된 나중의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장터의 아이들에 관한 비유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고, 그 이외의 비유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지혜에 관한 내용은 순차적으로 초대 교회가 첨가해서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혹자는 단일 자료설을 주장한다. 이들은 예수님을 '인자' 그리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부르며 또한 비유의 설명에 나타난 세례 요한에 대한 높은 평가는 초대 교회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삶의 자리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비유와 더불어 세례 요한과 관련된 앞의 내용 전체(마 11:2~14; 눅 7:18~30)가 예수님으로부터 파생된 단일된 형태의 자료라는 것이다. 양측의 견해가 맞서고 있지만 필자는 단일 자료설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간이 흘러 갈수록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점차 갈등 양상이 심화되는 것을 보면(참고, 요 1:20; 행 19:3), 세례 요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예수님의 삶의 자리를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② 마태와 누가의 자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초기 형태를 보유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먼저 a) 마태 우선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한 그룹'으로 표현한 마태의 보도가 더 본래적인 형태라는 것이다. 마태는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토이스 헤테로이스) 불러"(마 11:16)라고 보도하는데, 이것은 '한 그룹' 내에서 놀이에 참여하자고 제 동무인 '다른 아이들'을 불러 놓고, 피리를 부는 결혼식 놀이와 애곡하는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가 비유의 설명 단락인 금욕하는 세례 요한과 먹고 마시는 예수님의 생활 방식과 대립해서 잘 나타난다. 이들의 생활방식은 서로 갈등하는 두 그룹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요한을 통한 회개와 예수님을 통한 복음의 기쁨을 누리라는 이 세대에 선포된 동일한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러나 누가는 "'서로 불러'(알레로이스) 이르되"(눅 7:32)라고 보도하며, '두 그룹'의 아이들을 설정한다. 그래서 다른 두 그룹의 아이들이 한쪽에서는 결혼식 놀이를 하자고 말하며, 다른 한쪽에서는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서로 상대방에게' 자기의 놀이를 고집한다. 이러한 누가의 이해는 이차적인 형태라는 것이다.

반면 b) 누가 우선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지혜의 '모든 자녀[들]'(판톤 톤 테크논, 7:35)로 표현한 누가의 보도가 '행한 일[들]'(톤 에르곤, 11:19)이라고 보도한 마태의 표현보다 더 본래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마태가 세례 요한 전승의 서두인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타 에르가)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마 11:2)라는 내용과 연결시키기 위해 본래의 '자녀들'이란 단어를 '일들'로 바꿨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이란 단어는 누가의 첨가라는 것이다. 이처럼 양측의 주장이 서로 팽팽히 대립하고 있기에, 혹자는 마태와 누가가 같은 전승 자료를 자신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 부분적으로 편집 수정했기 때문에 자료의 우선성을 판별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둘째, 마태의 '지혜'에 대한 이해이다. 혹자는 지혜의 격언(11:19)에서 '지혜'와 '인자'가 동일시되기에, 초기 형태의 지혜 기독론이 나타난다는 것이다(참고, 마 23:34; 눅 11:49). 이런 논리에 따르면 예수님은 지혜 그 자체이고, 그의 행위는 지혜의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러한 이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 비유에서 "행한 일들"은 다름 아닌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과 삶의 양식에서 나타난 것을 모두 포함하기에, 여기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 비유에서 세례 요한과 인자이신 예수님은 모두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비유의 결론은 공동번역처럼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삶의]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라는 것이다.

끝으로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이다.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처럼 세례 요한이 금식하면서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라는 외침과 더불어 예수님이 죄인들과 식사하면서 "네 이웃을 서로 사랑하라"라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보다 공동체보다 '내'가 그리고 사랑과 정의와 나눔보다는 '돈과 명예와 권력'이 더 소중하다는 가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동에서 번쩍임같이 찾아올 것이다.

류호성 교수/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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