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하여 들어가야 할 좁은 문은 어디인가?

내가 선택하여 들어가야 할 좁은 문은 어디인가?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누가복음 <8>

왕인성 교수
2021년 06월 01일(화) 07:49
앞선 12장은 이 땅의 염려로 욕심과 근심 속에 살기보다는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여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며,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여 깨어 있으라는 권고로 마무리되었고, 누가복음 13~14장은 구체적으로 깨어 있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첫째, 깨어 있음은 재난의 소식을 통해서도 자신의 운명을 떠올리는 것이다(13:1~5). 몇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당시 사람들 사이에 회자 되던 최근 발생한 두 개의 사건에 대해 시사만평과 같은 의견을 구했던 것 같다.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을 방문할 때, 무슨 연유인지 군대로 급습하여 몰사시킨 일이 있었고, 당시 실로암 우물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그런 불행이 닥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아마도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큰 죄악을 저질러 하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논평 대신에 영적인 주제로 전환시키신다. 예수님은 죽음은 시간과 형태를 달리할 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며, 모두가 죄인이기에 회개를 통해서만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13:1~5).

둘째, 깨어 있음은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거나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을지라도 건실히 확장되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온갖 매체와 자료를 토대로 국제정세 및 경제 동향에 대해 침을 튀기며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가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민감해야 할 대상은 우리의 영원을 결정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점진적이지만 분명하게 확장되어 곧 우리 앞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다(13:18~21). 부동산과 주식과 00 코인이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셋째, 깨어 있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을 받는 사람의수가 적으니이까?'를 여쭈었다. 예수님은 구원받는 자의 수가 많고 적음에 대해서는 대답지 않으셨다. 들어가기를 구하나 들어가지를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는 말씀은 결과론적인 설명이지, 구원 받는 자의 수가 적고 많음이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것'처럼 보이는 자가 다 그 문을 통과하는 것은 아니다(13:23~28). 우리가 지금 할 일은 그 수를 괘념치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13~14장은 좁은 문을 이렇게 설명한다.

(1) 우리 삶을 반추하며 잎/입만 무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자신의 열매가 미흡하다면 열매 맺을 기회가 없어지기 전에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은 기회의 연장을 허락하셨지만, 이미 열매 없는 무화과를 찍어버리라고 명하셨다(13:6~19). (2) 다른 사람의 오랜 고통에 둔감해졌다면 속히 긍휼의 눈을 떠야한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18년 동안이나 귀신들려 허리를 펴지 못하던 여인과 수종병 든 사람에 대해 안식일에 고치는 일은 합당치 않다하여 그들의 오랜 고통에 눈을 감았다.(13:10~17; 14:1~6). 우리도 다른 사람의 오랜 고통에 둔감하거나 익숙해져 버렸다면, 완악해진 마음을 회개하고 그들을 즉각적으로 도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3) 예수님은 스스로 높아지려는 시도를 일관되게 경계하신다. 그 결과는 부끄러움이며 하나님 앞에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교류 방식은 내게 이익이 될 자를 우선한다. 이 또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시도의 연장선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보다는 갚을 길이 없는 약자들을 대접할 때, 의인들의 부활 시에 갚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4:12~14). 최근 나의 주된 교류의 대상은 누구인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은 멀리하고, 향후 내게 이익이 되는 교제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는가? (4) 세상일에 몰두하다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밭을 샀고, 새로 산 소 다섯 겨리를 시험해야 하며, 장가들었기 때문에 가지 못하겠노라는 거부는 우리가 들어가야 할 하나님 나라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상황으로 귀결된다는 경고이다(14:15~24). 하나님 나라의 내 자리를 기꺼이 양보하겠는가? 주님은 오늘 어떤 상황에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신가? (5) 주를 따름이 일시적 감정인지 일생을 통해 주님을 최우선으로 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참으로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망대를 세울 때 비용을 미리 계산할 것이며,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전쟁할 때는 군대의 수를 계산하고 전쟁 여부를 결정하듯이, 제자가 되기 전에 판단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판단해보고 주를 따르기를 멈추라는 말씀이 아니다(14:25~34). 미리 계산해보았을 때 손해로 판명되어도 제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다 이 세상의 것을 잃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의 것을 고수하며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따르지 않음으로 사탄에게 항복한다면 이 세상 뿐만 아니라 내세의 것도 잃게 될 것이다. 어차피 잃어야 한다면 무엇이 지혜로운 잃음인가? 그리고 내가 선택하여 들어가야 할 좁은 문은 어디인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마지막 말씀이 훨씬 무겁게 다가온다(14:35).

왕인성 교수(부산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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