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자'를 찾아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

'잃어버린 자'를 찾아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누가복음 <9>

왕인성 교수
2021년 06월 07일(월) 18:32
15:1~2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이 사람(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하였다. 당시의 문화권에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구와 식사를 하느냐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판별하는 척도였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생각하여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아무나하고 식사하지 않았는데, 후대의 어떤 랍비 문헌에는 아예 율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과는 함께 식사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관행에 대해서 예수님이 정면으로 도전하신다. 예수님은 대접 받고 나서 갚을 길이 없는 가난하고 미약한 그 '아무나'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라 하셨고(14:12~14), 말씀대로 사셨다.

'영접하고 같이 먹는다 하더라'에 사용된 헬라어는 현재형으로 예수님의 죄인과의 식사가 보여주기 위한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계속 되어왔고 지금도 진행 중인 식사모습임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오히려 종교 지도자들이 부정하다 하여 터부시하던 그 '아무나'와 기꺼이 식사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명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명예와 달랐다. 예수님께는 죄인과 약한 자를 동료로 여기며 품는 것이 진정한 명예였다.

15장은 예수님이 '아무나'와 격의 없이 어울리신 이유를 잃은 양(3~7), 동전(8~10), 아들(11~32)의 세 비유를 통해 설명하신다. 그 비유들은 '잃어버린', '찾은', '기쁨'이라는 개념으로 연결된다(6, 9, 24, 32).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사람과 교류를 이어가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과감히 관계를 단절하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떠나 하나님께 아무런 이익이 없을 존재들인 '잃어버린' 자들을 의도적으로 찾아내어 벗으로 자녀로 삼아주신다.

100마리의 양을 치던 목자는 한 마리가 보이지 않자 99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결국 찾아서 돌아와 기쁨으로 잔치를 베푼다. 잃은 동전 비유에서는 가난한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불을 켜고 비로 쓸면서 온 힘을 다해 찾아내고 이웃과 기쁨을 나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를 반드시 찾아내시고 그들의 돌아옴을 기뻐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 나라에 들어설 수 있게 된 이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 속에서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더 큰 기쁨을 준다는 예수님의 말씀(15:7)에 수긍이 가지 않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아무나'를 차별하던 바리새인 마냥 우리는 스스로를 의인의 범주에 놓는 병에 걸려 있다고 보면 된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길을 잃었었고, 앞으로 잃을 가능성이 있기에, 다른 사람의 넘어짐, 길을 잃음에 대해서도 이해와 포용의 폭을 넓히며, 우리 모두는 어떤 순간에도 겸손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여 정죄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세 번째 비유는 탕자의 비유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에게 미리 유산을 요구한 작은 아들은 외국에서 재산을 탕진한다. 유대인과의 관계도 끊겨 이방인에게 의지하여 돼지를 치며 연명하는 처지이다. 문득 굶주림에 지쳐 아버지를 기억하는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회개를 보이나, 아버지(하나님)는 그것이면 족하다 하신다. 아버지는 꾸짖음 없이 품꾼으로 여겨달라는 아들의 요구는 아랑곳없이,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준다. 인간은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데 익숙하나, 하나님은 모든 순간이 진심이시다.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큰 아들이 잔치 소리를 듣고 동생 이야기에 분노에 차서 아버지에게 말한다. '나와 내 친구를 위해선 염소 새끼 한 마리 안 잡아주더니.' 일견 큰 아들의 분노는 이해할만하다. 우리가 그런 동생이 있다면 동일한 불평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큰 아들은 아버지가 계셨기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생각지 않는다. 자기의 수고에만 눈길이 가 있다. 스스로를 품꾼보다 못한 존재로 여긴 작은 아들은 아들의 신분으로 회복되었지만, 항상 아들이었던 큰 아들은 스스로를 노예로 여기고 살았다('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15:29)이라는 말은 스스로를 노예로 여기는 표현이다). 아버지에 대한 진정한 공경이 아닌 자신의 수고에 눈길이 가 있는 아들에게는 은혜보다 대가가 중요했다.

흥미로운 것은 항상 집에 머물면서 아버지에게 충실했던 그 아들은 이제 집 밖에 머문다. 집 밖에 있던 아들은 집 안에 있다. 반전이다. 어느 학자는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할' 것을 요구한 큰 아들의 잔치에는 아버지도 작은 아들도 없다고 지적한다.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고 자신들만의 모임에서 정결을 외치며 먹었던 바리새인들의 잔치에는 하나님도 초대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나의 의를 자랑하며 나와 어울릴 사람만 선정하여 모이는 잔치에 주님이 안 계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물론 아버지의 받아주심은 작은 아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죄과를 아버지의 사랑이 뛰어넘는다는 가르침일 뿐이다. 여러분은 이 순간 큰 아들인가? 작은 아들인가? 내 눈길은 은혜에 가 있는가? 아니면 내 공로와 상급에 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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