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12

왕인성 교수
2021년 06월 30일(수) 14:06
삭개오 이야기(19:2~10)는 앞선 18장의 부자 관원 이야기(18:18~23)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란 제자들이 제기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는 질문(25~26절)에 대한 답이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회심과 결단에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다. 부자 관원은 영생에 대한 관심으로 긍정적인 믿음을 지닌 자였으나, 재산을 다 팔고 예수님을 좇으라는 명령에 심히 근심하며 주저하였다. 예수님의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명령은 문자 그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부자이나 교회공동체와 이웃들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지 않고도 재물을 선하게 사용한 그리스도인들의 모범 사례는 충분히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다 팔아'라는 요구는 하나님과 그 재물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물으신 것이며, 부자 관원의 재물은 그의 헌신의 깊이를 깨닫게 하는 아킬레스건이었다. 삭개오는 회심 후 집을 떠나지도 않았고, 절반을 내놓겠다고 했지 전 재산을 헌납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에게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신다.

부자 관원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는 말을 통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는가를 물은 것이었고, 재산의 전체가 아닌 절반이나 1/3도 내놓기를 주저했을 것이며, 삭개오는 절반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셨다면 전부를 기꺼이 내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억측일까?

한편으로는 삭개오 이야기는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가 은혜만을 강조하며 삶의 변화나 결단이 없어도 되는 것처럼 보일 것을 대비하여 균형을 맞춘다. 앞선 3장에서도 회개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의 설교에 대해 세리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 질문하여 삶으로 드러나는 회개의 중요성이 강조된 바 있다(3:12). 죄인의 그러한 변화는 그 어떤 설교보다 강력하다. 찰스 스윈돌은 입으로 하는 것 보다 더 강력한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회의주의자는 당신의 교리를 부인하거나 당신의 교회를 공격할 수 있으나 당신의 생활이 깨끗해졌고 엄청나게 바뀐 사실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나와 같은 설교자의 설교나 전도자들의 말에는 귀를 막을 수 있으나,… 당신이 회심하게 된 그 경위들은 요한복음 3장이나 로마서 5장에 대한 설교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훨씬 더 적절하며 호소력 있다"('Main 아이디어로 푸는 누가복음', p. 431). 현재의 우리 삶은 무엇을 설교하고 있을까?

19장은 삭개오와 달리 아무런 삶의 변화가 없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한 므나 비유'를 통해 교훈한다(19:11~27).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가면서 종 열 명을 불러 약 3개월치 임금에 해당하는 한 므나 씩을 나누어주고 귀인이 왕이 되어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하였다. 이 비유를 통해 누가는 종말이 예상한 것보다는 더 오래 걸릴 수 있음을 표현하며, 그럼에도 왕은 반드시 돌아오기에 왕에게 신실할 것과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것을 알게 한다. 특히 이 비유는 책임을 방기하고 수건에 한 므나를 싸두었던 세 번째 종에게 집중함으로써 주인의 명령에 신실치 못한 종에게 임할 운명을 경고한다. 많이 수고한 이들에게는 더 많은 것이 주어질 것이나, 일하지 않는 자는 자신이 갖고 있던 것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우리의 회개의 징표로 요청되고,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일 중 여러 구실과 이유를 들어 미적미적 진행하고 있는 일은 없는가? 지금은 그 구실이 설득력 있어 보이나, 주께서 오시는 그때에는 우리의 구실과 변명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삭개오는 자신의 회심의 결과를 분명히 내어놓았다. 다윗은 법궤가 돌아올 때, 왕좌에서 내려와 길 위에서 힘을 다하여 춤추며 기뻐하며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뿐임을 만 천하에 선포하고 고백하였다(삼하 6:14). 주님의 왕 되심을 고백하고, 우리가 회개의 삶을 살고 있음을 다른 이들이 확인할 수 있는 우리의 변화는 무엇인가?

9~19장까지 진행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행은 이제 예루살렘 입성으로 마무리 된다(28~44절).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무리들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고 환호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에 어떤 바리새인들은 그 환호를 달가워하지 않고,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돌릴 합당한 영광에 대해 침묵하거나 입을 닫을 때, 돌들이 대신 소리 지르고 찬송할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인가? 맥추감사절을 앞두고 우리가 망각하거나 미처 생각지 못한 감사의 제목과 이유를 찾아보자. 겉으로는 건재하나 속으로는 무너져버린 성전과 예루살렘을 보시고 예수님이 우셨다(41~48절). 나를 위해 예수님이 울고 계실 상황은 없는가? 바리새인 마냥 심판의 길을 가면서도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끝까지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만에 빠져있지는 않는가?

왕인성 교수 / 부산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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