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필요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

자신의 필요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14

왕인성 교수
2021년 07월 16일(금) 15:51
21장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로 시작된다(1~4절). 이 이야기는 앞선 20장의 부유한 서기관들의 외식과 위선, 그리고 재물 탐닉에 대한 경고(20:45~47)와 상응한다. 예수께서 성전의 헌금함에 헌금하는 부자와 가난한 과부를 지켜보시다가, 가장 작은 단위의 화폐였던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를 칭찬하신다. 부자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며 생색을 냈을 것이나(참조. 마 6:2), 가난한 과부는 인간의 기본적인 자기보호 본능마저 거스른 채,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고,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였다. 예수님의 칭찬은 우리의 모든 헌금이 자신의 쓸 것을 남기지 않고 다 바쳐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필요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외식으로 범위를 확장한다.

어떤 사람들이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진 성전을 보며 감탄하였다(5절). 바리새인의 헌금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그들이 감탄하는 그 성전의 주인공은 하나님이 아니셨다. 당시의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스룹바벨 성전을 약 46년에 걸쳐 대규모로 증축한 터였다. 성소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포도나무가 금으로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 부조의 잎사귀 하나, 열매 하나, 혹은 한 송이는 아마도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들이 바쳤을 것이며, 사람들은 값비싼 재료와 예술적 기교에 탄성을 내질렀다고 한다.

성전의 장엄함에 매혹된 이들은 그 성전이 자신들을 영원히 지켜줄 것으로 믿으며, 다가오는 멸망에 대해 애써 눈을 감았다. 사람들의 감탄을 들으시고, 예배를 흉내 내나 예배가 없던 성전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려 지리라'는 예언은 실제로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성취되었다(6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 일이 발생할 시기의 징조를 여쭌다(7절). 예수님은 징조로 거짓 그리스도의 준동, 전쟁과 난리와 기근과 소요의 소문들을 말씀하신다(8~11절). 그러나 사실 이러한 재난적 사건들은 징조가 아니다.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주후 70년의 예루살렘의 몰락과 성전의 붕괴 사건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지만, 난리와 기근과 전쟁, 지진, 전염병은 모든 시대에 있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종말의 진행 상황을 시간대별로 알리는 징조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과 사건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필자는 수업할 때, 특정 사건과 종말을 연계하여 위협하며 두려움을 안기는 종말론자들을 경계시키면서, 디모데후서 3:1~5의 말씀을 종종 인용한다. 사도 바울은 종말, 말세의 때를 이렇게 정의한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바울이 말한 종말의 현상은 이미 오늘날의 시대에도 충분히 진행되고 있다. 주님의 재림과 함께 임할 최종적 종말은 아직 아닐지라도, 그 종말이 언제 임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엄청난 규모의 성전이 자기들을 영원히 보호해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힘 있어 보이는 이 세상의 대상들이 영원히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시선을 거기에만 두고, 내 손에 그 대상이 들어온 것 같으면 마냥 든든해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일기예보를 더 신뢰한다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 의미 있게 다가온다. 한 날을 준비하면서 열심히 기상청 예보에는 귀 기울여 보고 듣지만, 영원을 좌우할 하나님의 종말에 대한 예언과 경고는 귓등에도 두지 않는 현실을 꼬집은 말씀이다.

앞선 기고들에서도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말했으나, 특별히 21장은 종말에 대한 준비로 깨어 있으라 하시면서 다음의 정신을 권고한다. 첫째, 하나님도 받지 않으실 생색내기 헌신을 그치며, 생명을 바친 것과 같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마냥 온전히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둘째, 특별한 징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위난에도 하나님 없는 삶의 종국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갈등이 빚어질 때, 두려워하지 않고,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영원으로 이끄실 하나님을 고대하며 인내로 영혼을 얻어야 한다(18-19절). 셋째, 헌신은 안락함의 추구가 아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주신 예수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쉬셨다(37절). 낮에는 분주히 가르치시고 밤에 집이 아닌 산에서 쉬셨다니! 예수님의 삶은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말씀에 갈급했던 무리는 산에서 쉬시고 내려오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서둘러 성전에 나아갔다(38절). 나의 첫 시간은 무엇에 활용되며 이들만큼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가? 입으로는 바리새인의 위선을 비판하나, 정작 칭찬과 안락함에 익숙해져 버린 종교인이 곧 나의 모습은 아닌가?

왕인성 교수 / 부산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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