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육간의 공간을 주님을 위해 내어드리자

내 영육간의 공간을 주님을 위해 내어드리자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15

왕인성 교수
2021년 07월 21일(수) 16:21
필자는 누가복음 연재를 시작하면서, 누가가 황제를 비롯한 정치 권력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을 등장시켜 인간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역사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경륜 속에 이끄시는 구원사(salvation history)를 대조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22장의 중심이 되는 예수님의 수난 기사도 세상의 권력자가 자기 의지로 주관하는 것 같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과 예수님의 의지가 이 모든 사건을 주도하고 계심을 설파한다. 그리고 이제 예수께 대한 시험의 실패(4장) 후 얼마 동안 떠났던 마귀가 다시 전면에 등장한다(3절). 그 장면의 배경이 흥미롭다. 바로 유월절인 까닭이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애굽의 학정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신 구약시대의 구원의 날이다. 예수님은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온 세상을 구하실 신약시대의 유월절을 준비하신다. 이 때 준비된 만찬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사역의 의미를 기억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유월절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반추하는 날임에도 전혀 다른 성격의 일이 준비된다. 죄된 인간들과 사탄의 사주를 받는 이를 대표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생명을 해하는 일에 열심을 내며, 특히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한다(1~2절). 반면에 예수님은 스스로를 희생시켜 인류를 구하시려는 대속적 죽음을 준비하신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날들, 특히 다양한 의미 있는 날들을 맞이한다. 우리는 그날들이 예수님의 유월절처럼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닌,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여 생명을 살리는 날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제 펼쳐질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에는 세 부류의 등장인물들이 나타난다. 먼저 긍정적 역할을 맡은 이들이다.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남자는 얼굴도 이름도 드러나지 않지만,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위해 자신의 공간을 제공한다(7~13절).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내 삶의 어떤 공간을 내어드리는가?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긍정적 역할의 담당자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당신의 지상 사역의 끝을 아신다: "인자는 작정된대로 가거니와"(22절). 예수님은 22장에서 사명은 한 번의 결단으로 완결되지 않음을 알게 하신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하나님을 따르는 일이 한두 번의 감동 혹은 흥분 속의 결정으로 진행되는 일이 아니며,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을 땀이 피가 되는 심정으로 견주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39~44절). 아울러 기도 없는 제자들의 호언장담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는가를 보게 한다(45~46절). 기도가 우리를 사명에 붙어 있게 하는 강력한 접착제이다.

부정적 역할의 배우들은 당연히 종교지도자들, 유다와 사탄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찾았으나 매번 실패하였다. 유다의 제안으로 돌파구를 찾아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4~5절). 두려운 것은 우리가 악을 꾀할 때 길이 막혀 우리가 시도조차 못한다면, 추가적 죄를 짓지 않아 차라리 나을 것이나, 악은 오히려 그 시도가 무위로 그치지 않도록 반드시 길을 찾아 제공하여 우리를 더 큰 죄악으로 이끈다는 점이다.

우리는 유다의 배신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이유를 일부러 찾을 필요도 없다. 유다는 예수께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예수님을 능히 배반할 수 있는 이들의 대표이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르는 마음을 품게 되었을 때, 악은 우리가 악을 중단하거나 떠나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하여 우리를 붙든다. 예수님을 처형할 방법을 고심하던 종교지도자들의 악한 마음에 유다가 길을 제시했고, 예수님이 자신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자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는 유다의 악한 마음에 사탄이 길을 제시하였다.

한편으로는 부정적 역할이었으나 긍정적 역할로 전환되는 이들이 있다. 뜬금없는 자리 논쟁을 펼치며(24절), 자신들의 이익에 눈이 멀어 예수님의 죽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제자들이다. 예수님이 나를 팔 자가 여기 있다 하실 때, 모두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21~23절).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사탄이 밀 까부르듯 요구하였다고 하심으로 제자 모두가 사탄에게 굴복하는 상태에 놓였음을 말씀하신다(31절). 주님의 관심사와 우리의 관심사를 일치시키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든 사탄의 청구로 주님을 배신할 수 있다. 베드로는 상황파악이 되지 않고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다고 허언을 내뱉는다.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그가 닭 울기 전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고 말씀하신다(33~34절).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54~62절).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실족하여 넘어질 것을 아신다. 그럼에도 우리가 감사할 일은 주님이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주시는 까닭에 하나님의 생명 사역에 우리의 역할이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내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붙들어주시기에 오늘도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인간적인 자신만만함은 우리 인생에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임을 망각하게 하고 예수님에 대한 부인으로 귀결될 뿐이다.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에서 우리는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가? 나를 높이기보다는 내 영육간의 공간을 주님을 위해 내어드리자.

왕인성 교수 / 부산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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