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다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다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16

왕인성 교수
2021년 07월 27일(화) 07:35
힘의 논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과 이익에 방해가 된다면 그 사람의 제거를 최상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요한복음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하였고,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이 날부터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고 기술한다 (요 11:50, 53). 빌라도도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유대인들의 계획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자신이 책임지는 체제가 위협받는 것을 간과할 수 없어 부정의에 동의하고 만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제거할 계획이 착착 완성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하나님의 big picture의 지극히 작은 한 조각에 불과했다.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는 때로 무력해 보이나 인간의 사고의 틀을 훨씬 뛰어넘으며 참 승리와 진정한 인류의 유익을 가져온다. 어둠이 짙어야 새벽이 가깝다는 말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예수님의 부활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누가복음이 기술하는 예수님의 생애 중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가장 중요한 두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 속의 다양한 군상의 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찾아보자.

빌라도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발장을 접수하고 예수님을 재판석에 세우나 딱히 죄목을 발견치 못하고, 헤롯에게 예수님을 보내어 판단케 함으로 슬쩍 공을 넘긴다. 호기심으로 예수님이 베풀 기적을 구경하길 원했던 헤롯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자, 왕의 옷을 입혀 조롱하며 빌라도에게 다시 예수님을 보낸다. 빌라도와 헤롯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는 친구가 되었다(23:1~12). 악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언제든 규합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생각이 다르다 하여 뜻을 모으지 못한다면, 우리는 악보다도 못한 존재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명분이 분명하다면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에게 기꺼이 힘을 실어줄 관대함과 용기가 있는가?

빌라도는 결국 무리에게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에 넘겨준다(23:13~25).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동조하는 무리들은 로마인의 손으로 예수님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주후 70년 또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손을 잡았던 로마인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성전을 통해 재산과 권력을 유지하던 제사장 그룹은 성전의 파괴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과 손을 잡는다면, 결국은 그 악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당사자가 된다는 교훈이다.

낯선 구레네 시몬의 도움을 받지만(26절), 골고다를 향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곁에는 3년여의 시간을 함께 한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이 죽음을 예언하는 중에도, 누가 더 크냐를 논하던 이들은 무력하게 잡혀가는 예수님과 동행할 의지가 없었다.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 들어설 때, 좌우에 서게 해달라고 요청했던 야고보와 요한 대신에, 그분 곁에는 두 강도가 함께 섰을 뿐이다. 예수님은 묵묵히 이 부조리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안고 가신다. 그리고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입니다"(33~34절). 이 기도에서의 '자기들'은 단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빌라도, 종교지도자, 군인들과 무리만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우리의 죄악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크게 기여한 까닭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로 내몬 사람들의 무지를 안타까워하셨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용서하신다. 예수님의 이 용서하시는 기도 속에는 영광은 누리고 싶으나 고난의 자리는 멀리하는 우리의 모습도 포함 된다.

사람에게서 신뢰를 발견치 못한 예수님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말씀하신 후 숨을 거두셨다(46절). 우리의 삶도, 기도도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사람을 보면 만족함이 없다. 우리의 생명을 맡기는 온전한 의탁은 주님께만 향해야 한다. 사람에게 기대지 말라. 누가는 십자가상의 한 강도를 통해 믿음과 구원의 독특한 사례를 제공한다. 그 강도는 가장 무력한 시점의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발견한다(42~43절). 우리는 능력의 주님만을 믿음의 대상으로 두지 않는가? 이 강도의 구원은 평생 악을 행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면 된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누가의 관심은 어떠한 자리에서도 회개의 순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응답이 즉시로 임한다는 가르침에 있다. 이 강도처럼 내 삶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예수님마저 무능해 보이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영육간의 구원을 간구할 수 있는가? 또 다른 변함없는 헌신의 대명사는 여인들과 아리마대 요셉이다(49~56절). 정작 제자들은 사라지고, 중범죄자의 동료로 간주되어 생명이 위태할 수 있는 상황에도, 변함없이 예수님을 최우선시하는 이들이 참 믿음의 모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가가 제시하는 답이 여기에 있다. 어찌하여 예수님을 '어찌하여 살아있는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24:5). 부패하여 죽음과 멸망으로 사라질 세상에서 답을 찾지 말라. 모든 문제 너머에 주님이 살아 계신다. 부패한 세상도, 죽음도 예수님을 붙잡지 못한다. 세상의 어둠이 짙을수록 가리어진 눈을 열어주시고 마음을 열어 부활하신 주님과 생명을 보게 해주시라고 기도하자(24:16, 31~32, 45).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다. 영원토록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을 경배하고 찬송하자(24:52~53).

왕인성 교수 / 부산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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