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의 영성과 신앙(마 5:1~12)

팔복의 영성과 신앙(마 5:1~12)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1

차정식 교수
2021년 12월 09일(목) 07:42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예수의 대표적인 가르침을 산에서 전수한 것이라 하여 산상수훈이라 부르고, 누가복음에 여기저기 흩어져 나오는 평행 버전을 지상에서 가르친 것이라 하여 지상수훈이라 부르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한 덩어리로 응집된 그 특성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역사적 예수의 전승을 담아낸 귀한 유산으로 기독교 안팎에서 다양한 주목을 받아왔다. 산상수훈의 전승사란 맥락에서 보면 이는 예수의 짧은 어록을 집성한 축약문(epitome)의 형식으로 제자 훈련용 매뉴얼의 성격을 띠고 있고, 마태복음(5:1)의 편집 서문에 의하면 이 말씀은 제자들과 일반 대중을 향해 두루 선포한 천국의 영성과 윤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의 시발점이 바로 팔복인데 여기에 예수는 운문의 형식으로 여덟 가지의 복과 그 인과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양식사적으로 보면 유대교의 기도형식 중 하나인 축복선언(macarism)의 패턴을 취하고 있다. 개인과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의 복을 선언조로 기원한 것이다.

이 여덟 가지 중에 가장 먼저 나오고 가장 논란이 많은, 또 이와 별도로 가장 중요한 해석적 원리를 품고 있는 구절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다. '심령'은 '성령'과도 통하는 희랍어 프뉴마(pneuma)로 누가복음의 지상수훈 버전에는 이것이 생략되어 경제적인 가난으로 간주하기 쉽게 그냥 '가난한 자'로 표기되어 있다. 이 구절은 흔히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겸허 또는 사람들 앞에서의 윤리·도덕적인 미덕으로 '겸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정치신학의 입장에서 지상수훈의 버전을 더 원전으로 삼아 경제적인 빈곤층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와 당파성을 암시한 증거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의 해석에 따르면 이 구절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보편적 인간의 가난한 실존을 염두에 둔 '인간의 조건'(condicio humana)을 가리킨다. 따라서 '심령이 …'라는 구절의 유무와 상관없이 이 구절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기원을 소급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최초로 피조물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을 때 그 벌거숭이 생의 유한성에 눈뜨는 의식을 전제로 그 의미를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난의 존재성에 대한 인식은 고대 그레코~로마 문헌이나 구약성서 및 유대교 문헌에 편재한 통설이라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이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눈뜨고 그런 유한한 피조물의 연약한 실존적 자의식을 갖게 될 때 사람은 죽음 앞에 선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애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영이 가난한 자의 복에 연이어 애통하는 자의 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연유다. 천국의 소망을 품고 위안처가 생긴 자는 애통함의 결과로 위로라는 선물을 얻을 수 있다. 한참 통곡하며 자신의 원통함과 안타까움을 토로한 사람의 통상적인 정서는 그 뒤에 찾아오는 부드러워진 마음, 너그러운 온정이다. 그래서 애통함의 복에 잇따라 온유한 자의 복이 나오는 것이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구절은 시편 37:11을 출전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맥락에서는 그 땅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땅에 국한되지 않고 지상의 땅 전체, 하나님의 왕국, 내세의 새 하늘에 잇닿은 새 땅 등의 지형으로 확장되는 함의가 내포된다.

5절 온유한 자의 복까지는 일관되게 자기 내면의 실존적 고뇌를 돌파해나가는 영성의 단계를 가리킨다면 6절부터는 바깥 세계를 향해 자신의 미션을 의식하는 단계를 반영한다. 그 첫째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인데 이는 자신의 존재 기원이나 종말의 문제를 해결한 다음 단계에 비로소 공적인 사명을 의식하며 그 목표를 찾는 단계이다. 여기서 '의'는 협소하게 보면 토라의 의이겠지만 넓게 보면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의 의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를 향한 갈망이 공적인 미션의 중심을 세워준다면 그 뒤에 나오는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5:7)은 그 외연을 확장해준다. 하나님의 의가 부정적으로 발현될 때 정죄와 심판의 잣대가 적용되지만 긍정적으로 발현될 때는 자비와 긍휼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까지도 긍휼의 대상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의의 한 면과 함께 반드시 갖추어야 할 다른 면의 방어막이다. 8절과 9절의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과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은 의와 긍휼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자 목표인 하나님의 샬롬과 그것이 내면에 자생하는 영적인 태반을 암시한다. 구약성서에 하나님을 본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불문율이 있지만 그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kardia)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 열려 있고 그것의 온전한 실현은 샬롬의 경지, 즉 화평의 가치로 나타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화평의 장애물이 많아 때로 부대껴 싸워야 하고 갈등을 감내해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 불가피한 수순이 되는데 여기에도 천국이란 복이 예비되어 있다. 9절의 이 복은 특히 이전까지의 3인칭 선언을 넘어 이제 "너희들"이라는 2인칭으로 표기돼 제자공동체의 구체적인 상황이 투사된다. 그 천국의 복이 온전히 이 땅에서 구현될 때까지 억눌려 고통스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전향적 믿음의 자세로 견뎌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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