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율법(마 5:17~20)

예수와 율법(마 5:17~20)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 3

차정식 교수
2021년 12월 22일(수) 07:10
예수께 율법은 어떤 존재였는지의 문제는 신약학계에서도 뜨거운 토론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즈음 대체적인 추세는 유대교의 역사적 맥락에서 예수를 유대인 예수로, 유대교의 율법에 비교적 충실했던 모습으로 조명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와 상반된 관점도 여전하여 예수를 유대교와 함께 유대교를 넘어선 파격적인 개혁과 혁명적인 도전의 측면에서 조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자료에 입각해 볼 때 분명한 사실은 유대교와 친근하고, 유대교의 율법에 충실한 예수의 모습이다. 물론 당시 유대교의 주요한 한 축을 형성하면서 정통 라인을 자부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율법 이해와 예수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상이한 점을 엿볼 수 있다. 약간 상이한 정도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 파격적인 차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예수와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일찍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롬 10:4)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마침'에 해당되는 희랍어(telos)는 '끝'(end)인 동시에 '완성'(fulfillment)이고 '목표'(goal)란 뜻도 동시에 내포한다. 루터교 신학자들은 '끝'을 선호하고 캘빈주의 신학자들은 좀더 유연하게 '완성'에 무게를 두고, 감리교 신학자들은 '목표'란 의미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3중적 의미를 배경으로 깔고 보면 산상수훈의 예수는 다분히 두 번째 의미 '완성'에 가까운 선택지를 보여준다. 아울러, 율법의 완성이란 측면에서 예수의 지향점은 그것을 폐기하는 것과는 다른 보수적인 대척점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율법이나 선지자의 기록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하게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마 5:17)는 말씀은 토라와 구약성서 기록에 대한 예수의 해석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그것보다 월등하며 최종적인 권위를 지님을 우회적으로 선언한 셈이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리라(마 5:18)는 선포도 문자 그대로 실현되리라는 문자주의적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해석을 통해 그 본질이 온전히 구현되리라는 메시지로 취하는 것이 옳다.

이 문단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19절이다. 여기서 화자는 17~18절에서 선포한 말씀의 반대 사례를 언급하면서 '율법'이나 '선지자' 대신 '계명'이라는 어휘를 선택하여 그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렇게 무시해도 괜찮은 양 가르치는 사람을 예로 들어 천국에서 작은 자로 일컬어지리라고 경고한다. 재미있는 점은 그렇게 문제적인 인물도 천국에 아예 들어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들어가긴 하지만 거기서 작은 자로 판단되어 열악한 위상에 처하게 된다고 말씀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산상수훈의 자료를 전승하여 선교적 공동체를 꾸려간 배후의 세력이 유대인 기독교도 집단이라고 상정하고 이 자료가 그들의 삶의 자리를 반영한다고 보는 역사비평적 입장에서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라는 성서학자의 오래 전 추론이 종종 회자되곤 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의 이 경고는 이것이 율법을 무시하거나 철폐한 이방인 기독교도를 견제하거나 우회적으로 비판한 유대인 기독교도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대목이 그 집단의 권위 있는 수장인 사도 바울을 염두에 둔 표적 비판이라고 읽어내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바울(Paulus)이라는 라틴어 이름이 '작은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자/편자가 바울의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패러디하여 율법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한 그의 신학적 지향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 추론의 시비를 떠나 이 어록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께서 단순히 율법을 이러저러하게 가르치는 데 국한해 말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것까지 문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율법은 유대인들이 선민임을 증명하는 특권적 장식품도 아니고, 단순히 암송하고 낭독하면서 은혜 받는 구원의 보증물도 아니다. 그것은 그 율법을 하사하신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담는 그릇이었고, 그곳에 담긴 말씀의 의도와 본질, 목적과 목표를 잘 궁리해 깨달아 그 선의를 살려 실천하며 행동하는 데 그 존재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행한 만큼 모든 구절구절의 깊은 의미를 새기고 또 후손들에게 가르쳐 전수할 때 율법은 완성되고 그 원초적 목적에 부응한다. 그 엑기스를 뽑아 한두 마디도 정리한다면 하나님을 온 정성 다해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하라는 것인데, 예수와 바울은 이 점에서 일치한다.

이에 비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그 문자에 집착하였고, 그것으로 자신의 위상과 계급을 특권화하였으며, 이로써 율법을 또 선민주의 이데올로기의 볼모로 만들어버렸다. 그것은 율법을 주신 분의 의도를 곡해한 것이고 그 목적을 왜곡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또한 자기의 의, 자기 집단의 편협하고 배타적인 의를 세우는 데 이바지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해석해 보여주신 토라의 의는 이러한 배타적인 경계를 넘어 그 폐쇄성을 타파하는 방향으로 펼쳐진다. 그것은 부요함이 아닌 가난함을, 자기들끼리의 희락과 잔치가 아닌 애통함을 강조하는 영성의 세계다. 이는 자기들끼리의 울타리를 벗어나 원수까지도 품어 햇볕과 비를 주시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개방적이고 보편적 신앙의 세계와 통하며, 장차 뭇 이방족속들에게 열린 선교의 방향을 암시한 구원의 지경이었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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