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화해(마태복음 5:21~26)

분노와 화해(마태복음 5:21~26)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 4

차정식 교수
2021년 12월 28일(화) 11:19
이 단락부터 산상수훈은 율법을 폐기하지 않고 온전하게 완성하는 것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그 가능성의 예를 제시한다. 가장 먼저 다루는 주제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한 소절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께서 이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옛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하게) 말해졌다고 너희들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이와 같이 다르게) 말한다'는 일관된 패턴의 화법에 따라 진행된다. 이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옛 전통이 그 자체로 권위를 갖기보다 그것을 꾸준히 변하는 시대의 맥락 속에 재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진작시켜준다. 아울러, 수동적인 '들음'의 행위가 진리 수행의 길에서 충분하지 않고 더러 진리 자체를 그르칠 위험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역접부사 '그러나' 이후의 진술은 예수께서 새롭게 조명한 계명의 의미이다.

예수의 계명 해석에서 중요한 기준은 어떤 현상에 집착하기보다 그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내면적 동기다. 살인과 관련하여 누구나 놀라는 것은 그 살인의 사건과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이 왜 살인을 하는지 그 구체적인 동기를 샅샅이 궁리하며 그 원천을 분노의 에너지에서 찾는다. 그렇다면 분노는 어디에서 발원하는 걸까. 예수의 예증은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살인죄에 대한 심판은 그 살인을 촉발하는 분노에 대한 심판까지 동반한다. 그런데 놀라워라, 그 분노는 형제를 향해 욕을 하면서 그 감정을 파괴적으로 자극하는 경솔한 언행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로 누군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못마땅해하거나 어떤 사유로 무시하며 경멸한다. 그런 부정적 동기가 작용할 때 욕설을 내뱉으며 까뭉개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 가운데는 욕을 먹을 만한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언행에는 반드시 반작용의 대가가 따른다. 이렇게 티격태격 서로 무시하고 욕하면서 싸우는 대결은 폭력의 충돌 현장으로 쉽사리 전이되고 그것이 살인을 부르는 구체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공회에 잡혀가거나 지옥 불에 들어가는 식의 심판을 모면할 수 없다. 전자의 공회(산헤드린) 심판이 지상 법정에서의 처벌에 해당된다면 후자의 지옥 불 심판은 사후 내세에서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될 심판을 가리킨다.

이어지는 구절 5:23~26은 이 분노의 문제를 제의적 예배란 맥락과 결부시켜 예증한다. 여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라는 문구는 형제에 무언가 적대적인 것을 품은 상태를 가리킨다. 그 적의는 다분히 분노로 충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제의적인 예배의 자리에 이르러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는데 그 적대감이 불끈 솟구쳐 예배의 순전한 자세를 어지럽힌다. 그 내면 상태가 그런데도 그 속내를 위장하고 표정 관리하면서 거룩한 포즈로 예물을 제단에 드린다면 그 예배와 예물이 헛된 일이 될 뿐 아니라 결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 적대감을 품은 형제와 더불어 화해하고 돌아와 그 예물을 드리는 것이 순서에 맞는다는 것이다. 이는 이웃이나 형제와의 화해와 화평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화해의 선결 요건이라는 이후 주기도문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셋째 예증은 법정 송사를 맥락으로 제시된다. 고발자와 피고발자가 서로 송사 관계로 엮여 재판을 진행하게 되는 경우 결국 그중 한 쪽이 처벌을 받아 감옥에 갇히는 징역형에 처해지거나 아니면 벌금형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오늘날의 복잡한 송사 현실에 비추어 3심제로 이루어지는 수년간의 이 법정 공방은 승자의 기쁨마저 그 피로감으로 다 탈색되고 패자도 당연히 그 과정 속에 황폐해지기 십상이다. 이처럼 승자도 패자도 뿌듯하지 않는 상황에서 차선의 대안은 미리 화해하고 법정으로 가기 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문제를 야기하고 피해를 끼친 쪽에서 결자해지하는 것이 물론 최선이다. 가해자 측, 즉 피고발인 쪽에서 악의적인 고의가 없을 경우 피해자 측에서 '합의'란 걸 해주면 최선이 아니더라도 대강 차선의 해법이 열린다. 그렇지 못할 경우 서로 갈 데까지 가서 파탄을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 둘째와 셋째의 예증에서도 분노가 그 저간의 핵심 모티프로 작동한다. 그 화라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서로 다투고 욕하며 잘잘못을 따지자고 법적인 다툼을 벌인다. 그 최악의 상황은 그 적대감을 무기로 상대방의 생명을 취하는 살인이다. 예수께서는 이 살인의 현상 이면에 잠복된 이와 같은 인간의 심리적 동기와 감정적 요인,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과 현장, 그 궁극적인 귀결 등을 두루 면밀하게 통찰하고 그 구조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제시함으로써 살인 금지 계명의 해석적 외연을 확대, 심화시킨 것이다. 오늘날 교회 내 예배의 자리에서 누군가에 대한 적대감을 품고 쓸데없는 예배의 언행으로 생활 속의 예배적 섬김을 놓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많겠으며, 또 그 가운데 보이지 않는 살인행위는 그 회칠한 무덤 속에서 얼마나 자주 자행되고 있을 터인가.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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