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과 실족에 대하여(마 5:27-30)

간음과 실족에 대하여(마 5:27-30)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 5

차정식 교수
2022년 01월 06일(목) 14:04
예수께서는 이 대목에서도 앞과 동일한 화법으로 과거의 전승을 먼저 인용한다. 그것은 십계명에 나오는 구절로 "간음하지 말라"(출 20:14)는 조항이다. 예수 시대의 사람들은 토라의 말씀, 곧 모세오경에 이렇게 말씀되었다고 꾸준히, 반복해서 들어왔다. 그러한 수동적인 청종은 그러나 간음을 방지하는 데 개인적으로 별 도움이 안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육체에 달라붙은 욕망의 실체를 잘 파악하여 그 정체를 깊이 이해하고 매사 슬기롭게 조율하며 절제하는 훈련과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러나'라는 역접부사를 사용하여 그것이 해석의 문제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저러하게 다르게) 말한다"는 어법은 앞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간음이란 문제에 대한 예수의 심층 분석과 해석을 동반하는 새 시대의 새 교훈을 예고한다.

예수의 그 분석과 해석에 의하면 이 조항을 문자 그대로 피상적으로 이해한 사람은 간음의 현상과 결과에 집착한다. '간음하다'(moicheuo)라는 말은 혼인한 사람이 자기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배우자와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뜻한다. 창녀 등이 개입한 관계에서 성적인 방종을 일삼는 일반적인 음행(porneia)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자기 아내를 두고 남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간음의 기본 상황이다. 반대로 자기 남편을 두고 다른 남편과 성관계를 맺는 혼인 여성의 경우도 상정할 수 있지만 예수는 이 경우를 생략한다. 당시 가부장체제 내에서 성적인 주도권이 여성이 아닌 남성에게 있었고 그로 인해 여성에 대한 성적인 억압과 차별이 엄존했음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예수의 심리적 통찰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아내에 대한 성관계에 만족하지 못한 채 성의 본래 목적을 왜곡시켜 탐욕의 매개로 삼은 혼인 남성들이 남의 아내와 성 관계를 맺게 된다. 예수는 타락한 욕망으로서의 탐욕, 또는 무절제한 정욕이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저변의 충동을 직시하였다.

본문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남의 아내를 정욕/탐욕의 대상으로 삼기 위하여 바라보는 자를 가리킨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가 먹음직하기 전에 보암직했던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여기서도 안목의 시선이 그 정욕을 매개하는 일차적인 채널이 된다. 간음이 그 시발적인 기원에서 나쁜 것은 여자라는 인간을 그 주체적 인격을 무시하고 탐욕의 수단으로 삼아 이용하기 때문이고, 이미 합법적인 관계를 맺은 남자 배우자의 존재와 인격을 멸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음욕'으로 번역되어 왜곡된 '욕망'을 가리키는 헬라어 '에피튀미아'(epithymia)는 신약성서 전체의 맥락에서 3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먼저 중성적인 의미로 새기면 이 어휘는 우리 생의 바퀴를 굴려가는 동력을 가리키지만, 그것을 순화시키고 신실하게 연마하여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화시키면 사람과의 관계를 윤기 있게 하는 그리움의 '열정'으로 변신한다. 반대로 그것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잘못 발현되면 타인의 건강한 욕망마저 억압하고 잡아먹는 무절제한 정욕으로서 '탐욕'이라는 일그러진 개념을 갖게 된다.

이어지는 구절(마 5:29~30)은 간음의 직접적인 매개요인이 되는 눈의 시각기능을 문제 삼으면서 종말론적 심판의 맥락에서 '실족'이란 주제를 다룬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의 창조선물로 중요한 몸의 지체이지만 그것이 욕망의 건강한 기능을 왜곡시켜 탐욕의 빌미를 제공하고 마침내 영혼을 타락시켜 지옥으로 가게 만든다면 그것을 과감하게 찍어버리더라도 그 눈 한 쪽 없이 지옥을 피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교훈이다. 이 과장법의 레토릭으로 제기된 수사의문문은 '오른 눈'에서 다른 지체인 '오른 손'으로 확대되어 그것도 죄의 수단이 되어 온 몸을 지옥에 내던지게 한다면 마땅히 그것 없이 지옥을 면하는 게 유익하리라는 상식적인 논리를 이끌어낸다. 여기서 두 번 반복해서 강조적으로 쓰인 단어가 '실족하게 하다'(skandalizomai)라는 헬라어 동사인데 이는 오늘날 많이 쓰는 '스캔들'의 헬라어 어원에 해당된다. 그 문자적인 의미는 무엇에 걸려 '넘어지게 하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자신이 자신의 욕망에 속아 넘어가 자신을 넘어트리는 치명적인 오류를 암시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바울 사도의 경고가 있듯이,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정당화하면서 그것에 고삐매여 사는 존재다. 다만 그 욕망을 순화하고 조율하며 단련시켜 선한 의욕의 에너지로 추동하든지, 아니면 그것의 위험한 장난에 놀아나다가 속아버리는 자기기만의 족쇄에 채여 탐욕의 노예로 살 것인지는 결국 자신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는 타인이나 형제자매뿐 아니라 자신을 실족시키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제자도를 따르는 신앙생활은 그것을 제어하는 꾸준한 훈련의 과정이다. 특히 우리의 눈과 입과 귀, 손과 발, 나아가 그것으로 유발되는 각종 감각적 기능은 우리의 양심을 자주 속이고 자신을 넘어트림으로써 타인을 망치거나 타인을 수단화하여 넘어트림으로써 자신도 망치는 위험한 흉기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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