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에 대하여(마 5:33~37)

맹세에 대하여(마 5:33~37)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 7

차정식 교수
2022년 01월 18일(화) 10:55
네 번째 반제로 제시된 주제는 맹세이다. 맹세는 고대 종교와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주제로 구약성서에도 이와 관련하여 215번이나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관심이 지대했다. 맹세는 자신의 다짐과 확신을 일월성신 등의 우주적 권위나 신들의 이름에 의탁하여 인증받으려는 시도로 때로 종교적 제의나 희생제사 등이 동반되며, 주술과 결탁하기도 한다. 맹세 행위의 이면에는 인간의 언어에 대한 신뢰 문제가 깔려 있으며, 이는 결국 말로써 표현되는 인간의 실존적 연약함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고대 그레코-로마 문화 가운데 맹세의 적절한 사용의 타당성과 함께 그 오남용의 문제도 많이 거론되었고, 이는 유대교 전통에서도 동감하는 부분이었다. 다만 구약성서 이후 유대교 전통에서는 맹세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오남용되는 것과 맹세의 잘못된 사용이 이웃을 향한 거짓 증언으로 드러나는 점을 특별히 경계하였다.

당대 그레코-로마 전통이나 유대교 전통의 통상적인 사례에 비해 맹세에 대한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파격적일 정도로 예외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유일무이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맹세하는 행위 자체를 아예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맹세가 정당하고 유용하며, 어떤 맹세가 피해야 할 나쁜 경우인지를 구별해 그 인식과 실천의 적절성에 초점을 맞춘 여타의 사례와 달리 극단적인 선택을 지시한 셈이다. 이를 위해 인용한 종래의 맹세 관련 전통은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는 것인데 이와 같은 구절은 구약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가장 근접한 구절로 거론되는 본문은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레위기 19:12이다. 십계명에서도 이웃을 향하여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을 뿐인데(출 20:16, 신 5:20), 이는 맹세나 서원과 유형이 좀 다르다. 그렇다면 산상수훈의 이 본문은 어디서 인용된 것일까. 그 출처와 관련하여 가장 근접하는 것은 후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유대교 문헌으로 다음의 어록이 예시된다: "부지불식간이든, 의도적이든,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라. 영원하신 하나님은 맹세한 자가 누구이든 거짓 맹세자를 미워하신다"(Ps-Phocyl. Sent. 16). 이로 미루어 이 인용문은 구약성서의 수많은 맹세 관련 교훈들을 요약, 정리한 헬레니즘 시대 유대교 전통의 어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금하는 명령을 내리신다. 당시 사람들이 맹세의 권위 있는 매개체로 불러낸 하늘과 땅, 나아가 예루살렘과 머리를 내세워 도무지 맹세라는 걸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맹세 금지의 사유가 무엇이었을까. 비록 하나님의 이름을 그 맹세의 도구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저러한 매개체들을 내세운 그 맹세가 불발하여 헛된 기만으로 판명될 경우 그것들이 오염됨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명예가 훼손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에는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고 그 하나하나는 모두 하나님의 신성한 권위를 머금고 있다는 창조론적 통찰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하늘을 '하나님의 보좌'로 보고 땅을 '하나님의 발등상'으로 간주하는 시적인 상상력이 동원된 것이고, 예루살렘을 큰 임금 곧 다윗의 도성으로 존중하는 역사적 상상력이 작동한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머리도 하나님이 만들어 우리 힘으로 한 터럭도 그 색깔을 희고 검게 만들 수 없는 하나님의 고귀한 작품임을 역설한 것이다.

이 단락의 본문 중에서 가장 오해와 왜곡이 심한 구절은 마지막 37절이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많은 독자들, 설교자들이 이 구절의 교훈을 옳음과 그름에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밝히고 용감하게 표현하라는 뜻으로 새긴다. 여기에 차든지, 뜨겁든지 해야지 미적지근하거나 우유부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 덧대어지기 일쑤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런 뜻과 전혀 무관하다. 이 구절은 앞서 제시된 맹세하지 말라는 주제의 결론구에 해당된다. 여기서 '옳다', '아니라'로 번역된 말은 어떤 사안의 옳고 그름을 일컫는다기보다 질문에 대한 답으로 흔히 말하는 '예'와 '아니오'다. 우리의 언어는 인간의 실존적 연약함으로 인해 그 자체가 취약하여 맹세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무모하다. 그러나 간명하고 담백할 수는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묻거나 의견을 구하면 '예' 또는 '아니오'라고 간단하게 답해야 한다. 그것을 잘 듣지 못했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한 번 더 강조하여 '예, 예' 또는 '아니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의 신념이나 입장, 의견이나 주장을 확고하게 밀어붙이기 위해, 자꾸 과장되게 말하면 그것이 곧 맹세로 빠져드는 지름길이다. '정 내 말을 못 믿겠으면 내 손에 장을 지져' '내가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할게' '하나님 앞에 맹세하면 믿을 수 있겠지'…. 이런 식으로 장담하다 보면 인간의 언어에 허영과 허세의 거품이 끼고 결국 자신이 지키지도 못할 허황하고 왜곡된 언어로 타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36절은 맹세로 빠질 심리적 단서와 동기를 아예 제공하지 말고 그 싹을 잘라버리라는, 앞의 반제들에 제시된 교훈과 동일한 패턴의 메시지로 읽어야 한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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