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복률에 대해서(마 5:38-42)

보복률에 대해서(마 5:38-42)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 8

차정식 교수
2022년 01월 26일(수) 10:10
토라의 전통에 대한 인습적인 수용과 문자적인 적용을 넘어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제시하기 위해 예수는 다섯 번째 반제로 '보복률'을 예시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보복률은 토라에 반복적으로 나온다(출 21:23~25, 레 24:20, 신 19:21). 여기에 생략되었지만 상기 본문에서는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골절은 골절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림은 때림으로' '생명은 생명으로' 등의 다양한 사례들이 나온다. 이것은 고대 근동에 널리 퍼진 동해 보복률로 피해자가 입은 피해의 내용 그대로 가해자도 보복을 당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보증하는 근거로 오남용되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재해석 관점에 비추어 보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취지를 왜곡한 문자주의적 해석과 적용의 폐단일 뿐이다.

모든 법이 그렇듯,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 또한 정의를 증진하고 불의를 제거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의도적인 폭력이든, 우발적인 사고든, 다양한 이유로 한 생명이 죽었을 경우 그 손실을 가해자의 생명을 사형시킴으로써 보상받고자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정의는커녕 불의를 유발할 뿐이다. 이런 연고로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토라의 구절을 인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해당 구절을 주석하면서 눈과 이도 생명 다음으로 중요한 생명의 핵심 기관으로 그것에 상해를 입혀 시각기능과 음식 씹는 기능을 없애버리면 이 또한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상기 인용구는 황금률의 상호주의 윤리와 연계된 '법적인 원리'로서 이해할 때 그 적실한 의미를 취할 수 있고, 예수는 이런 관점에서 잘못된 해석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재해석을 제시한 것이다.

전통적인 보복률의 현장을 성찰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는 이 대목에서도 예수는 상대방에 대한 보복이 일어나는 심층적인 동기와 배경, 그 과정과 결과를 모두 총체적으로 고려한다. 예수께서 대안으로 제시한 보복률의 진정한 메시지는 그것이 토라의 법칙으로 그 본연의 목적에 걸맞게 정의의 실현에 기여하려면 역설적으로 아예 보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공공 사회에서 부득이하게 이루어지는 합리적인 사법처리나 온당한 법적인 대응의 불가론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가해자/피해자의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서 보복은 대체로 격한 분노와 과도한 열정에서 무차별한 복수의 형태로 나타나기 쉽다. 그러나 보복은 또 다른 폭력적 대응 보복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악순환은 정의를 세우는 율법의 기능을 세우기보다 허물어버린다. 이에 예수께서는 보복 금지의 방식으로 보복률의 법적인 목표를 현실적인 최선으로 이루어내고 황금률에 제시된 상호주의 윤리의 목표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예수는 네 가지 현장을 제시한다. 첫째는 누군가 자신의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는 명령으로 예나 지금이나 흔히 행해지는 폭력의 일상적 사례이다. 상대방의 오른뺨을 치려면 왼손바닥으로 치거나 오른손등으로 쳐야 할 텐데 이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매우 모욕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이에 맞대응하여 상대방의 오른뺨을 같은 방식으로 침으로써 보복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왼뺨을 돌려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둘째는 누군가 자신을 고발하여 속옷을 취하려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라는 명령이다. 그렇다면 발가벗겨질 텐데 그 수치를 감당해도 좋다는 말인가. 셋째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기원하여 로마 사회에서도 답습된 행태로 길가에서 만난 자를 군인으로 징발하던 당대의 배경을 깔고 있는 사례다. '억지로'라는 말은 군대 복무나 공공노역에 동원할 목적으로 공권력을 행사하여 강제로 5리의 동행을 요구하면 10리를 함께 따라가라는 것이다. 넷째는 돈거래를 비롯한 상행위를 배경으로 하는 삶의 자리다. 어떤 물건이나 호의를 구하는 자, 돈을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고 기꺼이 나눠주라는 것이다.

이 모든 사례에서 비례적 보복 원리를 내세워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상대방에게 동등한 상해와 손실을 입힘으로써 즉각 정의가 세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반발과 반작용 가운데 더 큰 손해를 입거나 끊임없는 보복의 악순환 가운데 공멸하는 길로 내몰릴 뿐이다. 이는 예수가 대안으로 제시한 보복의 중단이 가해자에게서 악한 동기를 분리하여 보복하지 않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대로 따르면 상대방이 추가적인 악을 행하지 않을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에게 보복률을 역으로 적용하는 결과가 된다. 이로써 상대방의 악행에 정당한 명분을 세워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셈이다. 결국 보복 금지는 보복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악과 대적하여 싸우는 선한 무기가 되고 악을 극복하는 공격적인 정의실현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보복률의 법적 원리에 담긴 신학 윤리적 메시지는 단순히 상황에 순응하며 쉽게 단념하는 패배주의의 태도와는 구별된다. 더구나 이는 악의 세력에 대한 무기력한 항복도 아니며 무조건적 평화주의나 일반적인 비폭력주의 노선과도 다른 선택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희생을 당한 피해자가 가해자를 경멸하거나 억지로 용서하는 선택을 강요하는 대신, 가령 왼뺨을 돌려대든지, 속옷까지 내주든지, 가해자를 정의의 거울에 비추어줌으로써 폭력적 보복의 비극을 성찰하고 이로써 이어지는 악순환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도록 치열하게 도전하는 행동인 셈이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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