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혀가는 우상 vs 구원하시는 하나님(사 46:1-4)

잡혀가는 우상 vs 구원하시는 하나님(사 46:1-4)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이사야 40~55장 연구 7

오택현 교수
2020년 04월 17일(금) 00:00
유럽에는 성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유수의 박물관들이 있는데 유물의 수나 내용에 있어 탁월한 박물관으로는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바티칸의 바티칸 박물관 등이 있다. 이러한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성서의 말씀을 확증해 주는 여러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박물관과는 다른 차원의 박물관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이다. 페르가몬 박물관은 성서의 도시에서 발견된 유적 중 건물의 잔해를 가져와 옛날의 모습으로 복구하여 박물관 자체가 옛 도시의 흔적을 재현하고 있는 희귀한 박물관이다. 그곳에는 요한 계시록의 버가모에서 발굴된 제우스 신전, 사도행전에 나오는 밀레도의 아고라 문, 그리고 바벨론에서 발굴된 가장 화려한 문인 이쉬타르 문이 복원되어 큰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중 이쉬타르의 문은 바벨론 느브갓네살 때 세워진 문으로 바벨론의 성문들 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이며 이 문으로는 주로 왕이 출입하였고 신년축제 때는 바벨론 각지에서 온 신들의 형상이 연도에 늘어선 사람들 사이로 행진을 하다 이 문을 통해 성안에 들어옴으로 축제를 마무리했던 문이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 말기에 이 이쉬타르 문 앞에서의 초라한 신년축제의 사건을 바라보면서 기록한 성경말씀이 이사야 46장 1~4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문 앞에 서있는다면 선지자가 바라본 이쉬타르의 문을 우리도 바라보며 당시의 사건이 눈앞에 복원되어 우리의 상상 속에서 성경의 상황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절에서 선지자는 이쉬타르의 문으로 들어오고 있는 바벨론의 여러 신들의 행진을 보며 예전의 위용은 다 사라져 버리고 이미 하나님의 종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 나라가 멸망당하기 직전의 상황에 와 있는 바벨론의 정황을 낱낱이 보도하고 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556~539 B.C.)의 연대기에 의하면 나보니두스의 재위 기간 중 3년에서 13년까지는 그가 아라비아의 오아시스 지역인 테마에 거주하며 마르둑 신에게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신년축제가 열리지 않았고 재위 17년에 비로소 신년축제가 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신년축제 기간에는 여러 지역의 신들을 바벨론의 마르둑 신전으로 가져왔다가 축제 기간 중 마르둑 신상과 함께 짐승이 끄는 수레에 실려 거리를 행진하는 의식이 있었다. 1절에 나오는 두 신인 벨과 느보는 모두 바벨론의 주신(主神)으로 벨은 본래 하늘의 신으로 모든 신들의 아버지였고 그 중심지는 니푸르(Nippur)였는데 나중에 마르둑신에 동화된 신이고 보르시파(Borsippa)의 신인 느보는 마르둑의 아들로 숭배받던 신이었다. 이들 모두 신년 축제의 신들의 행렬에 참여하는 중요한 신이었는데 이들이 엎어지고 구부러지면서 포로로 끌려가는 장면을 묘사함을 통해 선지자는 우상은 무능한 존재이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전능한 존재임을 선포하고 있다.

2절에서는 이러한 우상에 대한 조롱과 더불어 나보니두스 당시의 바벨론 제국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즉, 선지자는 나보니두스가 페르시아 고레스의 침공에 대비하여 자신의 부재로 중단되었던 신년축제를 다시 열며 제국의 멸망을 막아 보려고 안간힘을 다하였으나 바벨론의 백성들이나 마르둑 제사장들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선지자는 나보니두스가 어떤 노력을 기울일지라도 이미 나보니두스 지배하의 바벨론 제국의 국운은 기울어지고 있고 바벨론은 곧 멸망할 것이며 그들이 전에 유다를 포로로 잡아갔듯이 바벨론 신들도 짐승에 실려 포로로 잡혀가는 운명이 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또한 이 구절은 바로 직전의 말씀인 이사야 45장 23b절과 연결되어("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모든 존재 중에 바벨론 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을 선포하고 있다.

3절에서 선지자는 우상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모습을 선포하고 있다. 즉, 바벨론의 우상들은 무기력하게 짐승의 등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그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그들을 품었고 안고 다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돌보고 계심을 강조함을 통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우상의 행동과 하나님의 모습을 대조하며 우상을 조롱하고 있다.

4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이 백발이 되더라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그들을 품어줄 것이라 약속하고 계신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지었기에 끝까지 품어줄 것이라 약속하고 있고 반드시 구원을 이룰 것이라 강조함을 통해 바벨론 사람들을 구하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는 우상들과 전지전능한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한번 대조하며 백성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포로기 당시 유다백성들과 같이 오늘 우리는 두려움의 대상을 잘못 선택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들의 눈에 보기에 분명 강하고 두려운 대상이어서 너무나 쉽게 무릎을 꿇는 대상이 그 실상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경우가 너무도 많이 있다. 세상의 지배자였던 바벨론의 세력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고 선자자는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을 무력한 존재로 보며 바벨론을 두려워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오늘을 사는 우리도 별것 아닌 존재를 두려워하며 무릎을 꿇는 경우가 너무도 많이 있음을 살펴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갑'의 위치에 있는 존재만 보더라도 두려워하며 그들의 온갖 횡포에 말 한마디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정의와 공의를 버리고 무력하게 지내고 있는 모습을 너무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한 분뿐이며 그의 정의와 공의의 길로 간다면 더 이상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세상에 없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도 선지자는 두려움 가득한 세상에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 것을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다.

오택현 교수/영남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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