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세리도 바리새인도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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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16 우매한 두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비유(눅 15:11-32)

류호성 교수
2020년 11월 06일(금) 08:50
이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가장 위대한 비유로 간주 되며, 또한 복음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유는 문학, 철학 그리고 예술의 여러 방면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비유에 논의되는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는 자료에 관한 것이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L 자료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비유 전체 또는 작은아들의 독백을 발전시킨 18~19절이 누가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11~24절의 내용만으로 이 비유의 의미가 전혀 손색이 없기에, 큰아들과 관련된 25~32절은 누가가 창작해서 비유를 확대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주장들은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11~32절 전체가 예수의 전승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비유의 제목에 관한 것이다. ① 이 비유는 아주 오래전부터 널리 '탕자의 비유'로 알려졌다. 이 제목은 라틴어 성경 '불가타'에 부쳐진 'De filio prodigo'를 16세기 영어 성경이 '탕자의 비유'(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로 번역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어 성경은 전통적으로 '잃은 아들의 비유'(Der Verlorene Sohn)라고 칭하였다. 그런데 이 제목은 25~32절의 큰아들에 대한 내용을 담지 못하기에, 비유의 제목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반면 ② 혹자는 이 비유의 진정한 의미는 후반의 큰아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비유를 '불평하는 형의 비유' 또는 '기뻐하지 않는 형의 비유'라고 명명한다. 이에 반해 ③ 혹자는 이 비유의 중심적 인물이 아버지이기에 '아버지 사랑의 비유' 또는 '은혜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라고 말한다. ④ 혹자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세 사람이 각기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 또는 '어떤 아버지와 그의 서로 다른 두 아들의 비유'라고 말한다. 그런데 ④의 제목은 마태복음 21:28~32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전혀 다른 내용임), 또한 아버지와 두 아들의 특징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받을 유산을 미리 달라고 조른다. 이것은 아버지가 빨리 죽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상속받은 재산을 잽싸게 팔아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삶으로 그 재산을 모두 탕진한다. 그리고 큰아들은 돌아온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기는커녕 힐난하며(30절), 또한 동생을 위한 잔치에 분노해서 참석하지 않을뿐더러(28절) 그 잔치를 베푼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며 항변한다. 그래서 동생을 "[당신의] 이 아들"(호 휘오스 수 후토스, 우리말 번역에서는 2인칭 대명사 '수'를 번역하지 않음)이라고 칭한다. 두 아들은 모두 우매한 짓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러한 두 아들을 모두 사랑한다. 작은아들이 자신의 '살림'(비오스-이 단어의 본래적 의미는 '생명'임)을 다 탕진하고 돌아올 때,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간다'(드라몬)." 사람의 걸음걸이는 그 사람의 인품을 나타내기에, 노인이 달리는 것은 대단히 품위없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작은아들에게 달려간 것은 그를 기쁨으로 맞이하려는 것도 있지만, 그전에 그 아들을 동네 사람들로부터 보호하고자 함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살아계시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자는 패륜아이기에, 동네 사람들은 그러한 자를 몰매를 쳐서 동네 밖으로 내쫓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명예와 권위를 회복시키고자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22절)라고 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논쟁되는 어구는 "제일 좋은 옷"(스톨렌 텐 프로텐)이다. '프로텐'의 의미에 시간적으로 '첫째, 처음'의 의미가 있기에, 이것은 작은아들이 집을 떠나기 전에 착용했던 "예전에 입던 옷"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라면 신발도 예전에 작은아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제일 좋은 옷"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벌여 온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여, 돌아온 아들을 극진히 환대한다.

또한 아버지는 돌아온 동생의 잔치 소식으로 몹시 노해서, 함부로 말을 쏟아내는 큰아들도 사랑하신다. 큰아들이 "노하여 [집에]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다"(28절).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나온 것'(엑스엘톤)은, 그 아들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만약 아버지가 나오지 않았다면, 큰아들 역시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하는 불효자식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낙인찍혔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권하는데'(파레칼레이 아우톤), 이 문장은 새번역처럼 "그를 달랜다"는 의미가 더 적절하다. 아버지는 불평하는 큰아들을 달래면서 '얘'(테크논)라고 부른다. 이것은 '아이야' 혹은 '내 아이야'라는 의미로 애정이 담긴 호칭이다. 그만큼 큰아들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31절)라고 말한다. 이것은 큰아들에 대한 신뢰성과 더불어 장자로서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아버지는 속 좁고 우매한 큰아들도 지극히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의 제목은 '우매한 두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비유'가 적절하다.

셋째는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그리고 작은아들은 '세리와 죄인들'(1절)을 의미한다. 작은아들처럼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잃은 아들을 찾았기에 무척 기뻐하신다. 이런 이해는 보편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큰아들에게 있다. 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2절)을 의미한다. 큰아들은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가 오히려 달래면서 아들로 맞아 주신 것처럼, 그럼 하나님은 교만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달래시며 그들을 아들로 맞이하신다는 것인가? 비유의 논리상 그렇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아버지의 놀라운 지혜가 숨겨져 있다. 아버지는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잠 27:21)라는 말씀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칭찬을 통해 큰아들의 마음을 회개시킨다. 이러한 아버지의 크신 사랑 앞에 큰아들의 교만함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결국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인은 자신들의 행동을 회개함으로써 그리고 교만한 자는 칭찬을 통한 겸손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또한 그 아들 됨의 지위를 얻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류호성 교수/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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