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20. 하나님 위에 있는 바리새인과 하나님을 찾는 세리(눅 18:9-14)

류호성 교수
2020년 12월 04일(금) 17:05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도덕적 행위를 근거해서 자신은 '의롭고' 타인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자신의 행동에 근거해서 의롭다고 주장하는 자는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그 판단 기준을 내어 맞기는 자가 '의롭게 된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유일하게 성전을 소재로 한 이 비유가 바로 이점에 대해서 말한다.

이 비유의 논의들을 살펴보면 첫째, 본문의 문맥적 위치이다. 이 비유의 10절과 바로 앞 단락의 1절은 '기도'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이 비유를 기도와 관련된 모범 이야기로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중심인 10~13절의 내용이,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행한 기도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유의 핵심은 9절과 14a절의 '의로움'(디카이오스)에 있다. 말하자면 사람이 어떻게 해야 '의로워 질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의로움에 이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기도'가 제시된 것이다. 결국 이 비유의 핵심은 '의로움'이지 '기도'가 아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바리새인처럼 자신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행동을 했다고 하나님께 주장(기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세리처럼 겸손하게 의로움을 하나님께 맡길 때 '의로와 진다'는 것이다(14a절).

이런 겸손의 이야기가 15~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라"라는 권고로 이어진다. 그리고 18~30절에서는 부자 관리에게 '영생'은 십계명을 지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제자가 되는데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누가는 1~30절은 내용이 서로 겹치도록 배열해 놓았다. 곧 1~8절과 9~14절은 '기도' 그리고 9~14절과 15~17절은 의로움의 방법으로 '겸손함' 그리고 15~17절과 18~30절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제자도'의 틀로 구성했다.

둘째, 9절에 대한 이해이다. 예수님은 9절에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어떤] '자들에게'(프로스 티나스)"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이 직접 '바리새인'을 언급하지 않고, 부정 대명사 '티나스'를 사용해서 "[어떤] 자들에게" 말씀하신 이유를, 혹자는 예수님도 바리새인들 중에 착한 바리새인들도 있고, 나쁜 바리새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보다는, 바리새인들은 유별나지만 많은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도덕성을 통해 의로와지려고 애쓰고 있음을 예수님이 알고 있었기에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종교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개 자신의 행동을 근거로 의로움을 주장하는 특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셋째,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이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모두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11, 13절) 찾지만, 그들의 행동에는 크게 차이가 난다. ① 기도의 자세이다. 바리새인은 하늘을 응시하며 "따로 서서" 기도하는데, 이런 자세는 자신을 남들에게 돋보이고자 하는 행동이다(참고, 마 6:5). 반면 세리는 자신의 불결함을 인식하고 사람들로부터 "멀리 서서" 기도하는데,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불결한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응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다만 가슴을 친다." 이런 행동은 자신의 죄책감이나 슬픔 또는 뉘우침의 표시이다(참고, 눅 23:48).

② 기도의 내용이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은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다"라고 말한다. 곧 남들과 비교해서 자신은 잘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무엇보다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아포데카토 판타 호사 크토마이)라고 말한다(- 우리말 성경은 '모든'을 뜻하는 형용사 '판타'를 번역하지 않아, 바리새인의 잘난 척을 더 실감나게 표현하지 못하였다). 11~12절의 문장에는 '1인칭 동사'가 무려 '다섯 번'이나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기도하는 '바리새인'을 강조한 것이다. 곧 바리새인은 감사의 기도 형식을 빌어,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반면 세리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한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에 헬라어 '힐라스코마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대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참고, 히 2:17). 곧 세리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여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 것이다. 세리는 강조점을 '하나님'께 두고, 회개 기도를 한 것이다.

결국 바리새인은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우월성을 하나님께 통보해서, 마치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께 죄인인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한다. 그 결과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의롭다'라고 선포하신다(14a절).

끝으로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이다.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도덕적 행동을 통해서 의로움을 주장하는 자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교만하기에 마치 자신을 하나님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세리처럼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그저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의롭다'라고 인정해 준다. 이러한 은혜가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다. 그래서 '칭의'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자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류호성 교수/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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