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잃어버린 구령(救靈)의 열정을 회복할 때!

지금은 잃어버린 구령(救靈)의 열정을 회복할 때!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21 잃은 양을 찾고 기뻐하는 목자(눅 15:1-7; 마 18:12-13)

류호성 교수
2020년 12월 16일(수) 11:11
사해문헌은 1947년 아랍의 한 목동이 자신이 치던 양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 그것을 찾으려고 계곡을 헤매다가 우연히 한 동굴의 항아리에서 두루마리를 가져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목자는 자신의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그 잃은 양을 찾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이러한 점을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다. 주요 논의들을 살펴보면 첫째, 자료의 문제이다. 잃은 양의 비유는 마태복음 18장 12~13절, 누가복음 15장 4~7절, 그리고 나그함마디 문헌 속의 도마복음 107과 진리의 복음서 31:35~32:9에 나타난다. 이들 자료들 가운데 어떠한 것이 가장 초기의 예수님 전승인지에 대해서는 4가지의 견해가 있다.

Q자료라는 전제 속에서 ① 간결한 마태의 자료가 초기 형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양을 "어깨에 메고"(눅 15:5)라는 누가의 표현은 이차적으로 확대된 것이며, 7절과 10절의 '회개'에 대한 강조는 누가의 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15장에서 '잃음과 찾음'에 대한 연속적인 3개의 비유는 누가의 편집이라는 것이다.

② 이와 반대로 누가의 자료가 정황상 더 초기의 형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태의 비유는 문맥상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서라고 충고하기 위해 제자들인 기독교 공동체에게 말하고 있지만(마 18:10, 14), 누가의 비유는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용납하신 것을 변호하고자 적대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에(눅 15:1~2), 사회적 정황상 누가의 것이 더 본래적이라는 것이다. 곧 예수님은 이 비유를 대적자들과의 논쟁 속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③ 마태와 누가의 비유는 별개의 자료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태와 누가의 보도는 "양 백 마리"라는 점만 공통적이지, 표현에 있어 일치점이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각기 다른 정황에서 마태의 비유처럼 제자들에게 그리고 누가처럼 적대자들에게, 각각 비유를 달리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단 한 번만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며, 또한 마태와 누가의 비유에는 이미 각각의 특성이 너무 깊숙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분리하는 것 차제가 힘들기 때문이다. ④ 도마복음의 자료가 초기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 견해는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둘째, 이 비유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독자들은 이 비유를 읽으면서, 목자가 양 "아흔아홉 마리를 들(- 산)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 나섰다"(눅 15:4; 마 18:12)라는 내용에 대해 불쾌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목자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서 99마리 양을 내팽개쳤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독자들의 오해이다. 목자가 양 99마리를 세었다는 것은, 목자가 풀을 뜯기고 저녁이 되자, 양들을 일일이 세면서 '우리에 넣었다'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는 가운데 양 한 마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말하자면 목자는 99마리의 양을 먼저 안전하게 우리에 가둬둔 다음에,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러 나간 것이다.

그런데 목자가 99마리의 양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오해는 사실 비유의 적용 구절인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에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비교 논리에 빠져 예수님을 믿으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자신을, 우리의 목자되신 분이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7절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과 관련된 것으로, 말하자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한 사실에 초점을 두고, 그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참고, 눅 19:1~10의 삭개오의 회심).

그리고 예수님이 7절에서 말한 "죄인 한 사람은"은 1절의 "모든 세리와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을 의미하며,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은 2절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의인인척하며 살아가는 예수님의 대적자들이다( - 혹자는 '의인'은 죄없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의탁하고 있는 자들로 넓은 의미에서 '유대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세리나 죄인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7절에는 세리와 같은 죄인의 회개에 대한 기쁨과 더불어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비꼬는 표현이 동시에 들어 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읽으면서 독자 자신이 99마리 양에 포함된 의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교만한 부류에 속한 자들일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기에 매일 회개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존재이지,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은 결코 아니다.

끝으로 비유가 주는 교훈이다. 이 비유에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목자의 끊임없는 수고와 더불어 찾음으로 즐거워하는 목자의 기쁨이 잘 나타나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도 목자의 심정을 갖고 삶의 진리를 찾지 못해 헤매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천국의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위기의 한국 교회 미래는 구령(救靈)의 열정을 회복할 때에 희망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류호성 교수/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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