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나 선교를 위한 로마의 선교센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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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으로읽는성경 ] 27.사도행전 30년-(1)예수 승천, 죄수 바울

조병호 목사
2023년 07월 19일(수) 12:58
필자가 도식화한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과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예루살렘 공회 이야기', '죄수 신분이 된 바울의 로마 도착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사도행전'은 복음 1세대 사도들과 복음 전파를 방해한 산헤드린 공회의 30년 전쟁사(戰爭史)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기간은 기독교 역사에 아주 중요한 변천기였다. 이 놀라운 기록을 누가가 남겼다. 헬라인이며 의사이자 역사가인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책 '역사'를 능가하는, 기원후 1세기에 기록된 세계사적으로 손꼽히는 월등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가 헬라 출신으로 의사이자 역사가였다는 사실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일단 누가가 헬라인이었다는 것은 지식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의 귀족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그리스인(헬라인)들을 가정교사로 삼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만큼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의 학문과 문화를 존중했고, 그리스의 모든 학문과 문화를 배워 로마화하느라 여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헬라인 누가'라고 말하면, 당시 사회에서 최고의 학문이자 문화로 존중받고 있던 헬레니즘에 대해 이미 기본적으로 충분한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것은 그가 사도 바울처럼 로마 시민권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는 헬라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제국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500년 동안 유지하던 공화정을 접고 제정(帝政)으로 통치 형태를 바꿨다. 그러한 로마 제국의 제정 통치 밑그림을 모두 그린 사람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인데, 그가 제국을 위한 정책으로 의사와 교사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던 것이다. 누가가 활동하던 시기는 로마의 3대 황제 가이사 칼리굴라와 4대 황제 가이사 글라우디오, 그리고 5대 황제 가이사 네로가 통치할 때였기에 로마 제국 내에서 의사와 교사는 로마 시민권자로 위치가 탄탄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누가가 역사가라는 사실은 정말 중요했다. 그리스에서 역사가는 이미 훌륭한 역사 기록들을 통해 고대사회에서 가장 월등한 지성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리스 출신 역사가로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세 번에 걸친 전쟁을 기록한 헤로도토스, 그리고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 내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 27년간의 전쟁을 기록한 투키디데스 등이 이미 유명했다. 사실 누가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헤로도토스의 '역사'나,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훨씬 뛰어넘는다. 물론 그 이후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도 감히 누가의 기록을 뛰어넘기에는 역부족이다.

누가는 서양의 두 개의 뛰어난 사상이자 정신이라고 평가받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모두 섭렵한 역사가이자, '하나님 나라 이야기'와 '사도들과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 이야기를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역사로 기록'한 대학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누가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2000년간 스테디셀러였으며,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에게 수도 없이 읽히게 될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기록이기 때문이다.

누가는 '사도행전 30년'에 일어난 '산헤드린 공회 결정'과 '예루살렘 공회 결정'들이 '사도행전'의 시작 이야기인 '예수 승천'부터 '사도행전'의 끝 이야기인 '죄수 바울'까지 어떻게 상호 맞물려 있는지 설명한다.

먼저, 누가는 '사도행전 30'년 이야기의 시작은 예수님의 승천으로(행 1:9), 중간은 예루살렘 공회 이야기로(행 15:11), 끝은 죄수 신분이 된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다는(행 28:16) 이야기로 '사도행전'을 프레임화했다. 그 사이에 복음서의 1차 산헤드린 공회 재판인 예수님의 재판을 포함해 다섯 번의 산헤드린 공회 재판과 이들의 박해 가운데에도 전도인을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기도하며 결의한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들을 기록했다. 예수님의 승천부터 4차 예루살렘 공회까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이끌어간다. 그리고 4차 예루살렘 공회 이후부터는 당시 제자들을 비롯해 많은 전도팀이 있었지만, 바울 전도여행팀을 샘플로 하여 '사도행전' 끝까지 이끌어간다.

누가는 그 사이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4차 산헤드린 공회 결정으로 스데반이 순교한 이후, 바울이 제2의 스데반을 찾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기록한다. 이를 '다메섹 그 순간; the Damascus Moment'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도 서양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연구물을 발표할 때, 혹은 자기 삶의 지난 여정 가운데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억되는 그 시점을 말할 때 종종 '나의 다마스쿠스 모먼트'라는 표현으로 인용될 정도로, '다마스쿠스 모먼트'는 지식인들이 좋아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때로부터 '다메섹 외톨이'로 상당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4차 예루살렘 공회에서 '사랑하는 형제 바울'로 공식 인정을 받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행 15:25~26)." 이후 바울은 2차, 3차 전도여행을 거쳐 '선교팀장 바울'이 돼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실현하기 위해 '서바나 선교를 위한 로마 선교센터화를 목표'로 끝까지 달려간다. '죄수 바울'은 이 목표를 위한 바울의 선택이었다.

한마디로 누가는 '사도행전 30년'을 복음 1세대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아직도 제사장 나라를 붙들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의 박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한 이야기로 기록한다. 복음 전도가 승리했다는 선언이다.

조병호 목사 / 성경통독원 대표·통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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