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원들, 기독교 핍박 위해 하나 됐다

공회원들, 기독교 핍박 위해 하나 됐다

[ 통으로읽는성경 ] 28.사도행전 30년-(2)다섯 번의 산헤드린 공회 재판

조병호 목사
2023년 07월 26일(수) 14:59
대제사장 앞에 선 사도 바울을 묘사한 얀 반 데르 슈트라에트의 그림.
산헤드린 공회는 71명으로 구성돼 있었고, 공회원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구약 '왕정 500년'은 사울 왕으로 시작해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때 끝난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70년을 마치고 제국의 변동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귀환공동체는 페르시아 제국이 파견한 총독 치하에서 페르시아에 세금을 바치며 살아야 했다. 2차 귀환이 이뤄지던 때,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은 2차 귀환의 지도자 에스라에게 유대의 자치 지도부이자 레반트 지역의 사법 기구인 '산헤드린 공회'를 설립하도록 권한을 주고 이를 허락했다(스 7:25~26). '산헤드린 공회'는 에스라를 비롯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들이 뽑은 장로들 71인(혹은 70인)으로 구성됐다. 그 근거는 아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 70명을 회막으로 데리고 오라 말씀하신 데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민 11:16~17).

예수님 당시에도 산헤드린 공회는 71명으로 구성돼 있었고, 공회원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 부류는 '대제사장과 그를 보좌하는 제사장들'이었다. 제사장들은 성전 경비대장, 성전 창고 관리장, 그리고 대제사장을 도와 성전 제사를 돕는 제사장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대략 10명 정도였으며 대부분 사두개인이었다. 이들은 헬라 제국이 유대를 다스리던 때부터 제사장직을 돈으로 사는 사람들이었으며 성전 안의 모든 경제적 이권을 챙기는 자들이었다. 두 번째 부류는 '백성의 원로들' 즉 장로들이었다. 이들은 유대 사회에서 세습돼 온 귀족들로서 각 지파의 장로들이었고, 당시 유대 사회 내의 경제적 중산층들로 하시딤의 후예인 바리새인들이었다. 세 번째 부류는 '율법 학자들'이었다. 당시에 랍비 혹은 선생이라고 불리던 자들로 유대 사회에서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신분이었으며 많은 이들이 바리새인 출신이었다.

'사두개파'는 성전에서 주로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들로 모세오경만을 그들의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헬라 사상을 받아들여 천사와 영의 존재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막 12:18). 반면 '바리새파'는 모세오경과 선지자의 글을 모두 경전으로 받아들이며 회당에서 주로 활동하고 장로들의 전통을 중시했다. 그들은 정결법과 십일조를 강조하고, 천사의 존재와 사후 심판을 믿으며 안식일을 철저히 준수하고, 부활을 믿는 자들이었다(행 23:8). 그래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평소에 그들이 믿는 경전의 차이, 그리고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로 서로 견제하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방인의 뜰'에서의 경제적 이익 앞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모두 한마음이 됐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행전 30년 동안 예수님과 사도들과 관련해 다섯 번의 재판을 열었다. 1차 산헤드린 공회 재판은 예수님과 관련됐다. 겉으로 보면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의 3년 운동을 공식적으로 종료시킨 것 같았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오히려 산헤드린 공회 재판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부활 후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실 것', 그리고 '구름 타고 다시 오실 것'을 선언하셨다(마 26:64). 결국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 총독 빌라도를 이용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다. 이후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의 제자들로 인해 2차 재판을 열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활동을 산헤드린 공회의 힘으로 뿌리를 뽑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2차 산헤드린 공회를 열게 된 것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다시 공개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경고하고 '활동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때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언하는 일이 벌어진다(행 4:8~12).

3차 산헤드린 공회가 다시 열렸다. 제자들에 의해 예수 운동이 더 거세게 확산하였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향한 군중들의 지지 기반이 점점 커지자 급기야 사두개인들이 제자들을 시기했다. 사두개인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공회원 자격을 세습할 수 있어서 유대 사회에서 누구를 시기할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시기했던 것처럼 제자들을 시기했고 결국 3차 재판을 열고 이들을 죽이자는 의견까지 내놓았다. 이는 제자들이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라이벌이 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다행히 가말리엘이 중재하는 바람에 '채찍질' 판결로 끝날 수 있었다. 이즈음 예루살렘 교회 내부에 문제가 발생했다. 히브리파, 헬라파 사이의 분배 문제였다. 이는 헬라 300년 유대 통치 시기의 잔재이다. 제자들은 스데반을 비롯한 일곱 일꾼을 세워 이 위기를 극복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 내부의 분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이요, 구약 2000년의 성전 이야기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공개 증언한 사람이었다.

4차 산헤드린 공회가 다시 열렸다. 스데반을 죽여야 하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차 산헤드린 공회 재판 때처럼 거짓 증인을 세워 재판을 열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스데반의 증언에 양심은 찔리면서도 결코 회개하거나 마음을 돌이킬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결국 재판의 판결도 내리지 않고 무법자들처럼 스데반을 돌로 쳐 공개 처형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나름대로 사도들의 세력 확산을 막고 흩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5차 산헤드린 공회가 열렸다. 4차 산헤드린 공회 재판이 열린지 약 25년 만이다.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 로마 천부장의 협조로 5차 산헤드린 공회 재판을 열게 된 것이다. 이전 1차에서 4차까지의 산헤드린 공회 소집과 달리, 이번 5차는 로마 천부장이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5차 산헤드린 공회의 표면적 이유는 바울의 성전 모독 사건이었다(행 21:27~28). 그러나 실제로는 사도들의 복음 전파가 예루살렘에서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까지 넓혀졌기 때문이다. 이때 바울은 복음에 대한 마지막 설득을 시도하지만 통하지 않자,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오래된 갈등을 부추겼고, 이로 인해 5차 산헤드린 공회는 자중지란으로 종료된다(행 23:6).

조병호 목사 / 성경통독원 대표·통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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