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두 양태(눅 16:16, 마 11:12)

하나님 나라의 두 양태(눅 16:16, 마 11:12)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김형동 교수
2019년 05월 10일(금) 00:10
하나님 나라의 두 양태(눅 16:16, 마 11:12)



누가복음 16장 16절과 마태복음 11장 12절은 평행 본문이다. 그러나 그 어휘와 문맥과 의미는 사뭇 다르다.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세례 요한 때부터'라는 마태의 이해와 '(세례)요한의 때까지'라는 누가의 이해는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자체에 대해서도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두 본문이 그 삶의 자리를 벗어나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마태복음 11장 12절에 대한 성서 번역과 이에 따른 해석의 자의성은 올바른 신학적 이해를 요구한다(개역개정,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KJV, NIV 참조).

두 본문은 예수 어록(Q)에 속한 말씀이다. Q 16:16은 사람의 반응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동적 현재성과 임재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의 메시지는 사람들의 반응을 불러내는 강력한 힘을 가지는 하나님의 나라(또는 복음)의 전파로 드러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에 의해서 물리적인 힘에 의한 방해를 받기도 한다. 눅 16:16과 마 11:12는 각각 이러한 다른 정황과 이에 대한 복음서 기자의 신학적 해석을 반영하고 있다.

첫째, 주목할 것은 '침입하다'(눅)와 '침노당하다'(마)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비아제타이'이다. 비아제타이는 중간태, 수동태 꼴이다. 중간태는 '힘차게 다가오다'라는 능동적 의미를, 수동태는 '폭력에 의해 강탈되다, 강점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 논의되어야 할 문제는 새로운 시대(에온)와 세례 요한의 관련성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 때부터'라는 마태의 이해와 '(세례) 요한의 때까지'라는 누가의 이해는 상반되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지금(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시대에 포함되는가, 아니면 구약의 시대에 속하는가?

누가는 "율법과 선지자들은 요한의 때까지"라는 표현에서 요한을 구약의 시대에 포함시킨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도 계속하여 구원의 때는 세례 요한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강조한다(행 1:5, 10:37, 13:24~25, 19:4). 누가는 구원사의 시기를 명확하게 세 시기로 구분한다. 이스라엘의 시대―예수의 시대―교회의 시대(콘젤만)'. 예수의 시대는 구원사에 있어서 시간의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시대와 교회의 시대를 구분한다. 누가는 예수 이후로 시작된 교회의 시기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로 이해했다. 신약성서 가운데 유일하게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복음이 전파되다'(유앙겔리조마이)라는 동사와 연결시키고 있다(눅 4:43, 8:1, 행 8:12). Q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역동적 임재를 나타내는 동사 '비아제타이'를 누가는 능동적으로 이해하면서 이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다'는 말로 표현했다. 누가 행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한 편의 서사시처럼 진행된다. 따라서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쓰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 7:13)는 마태 본문과는 달리 누가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개역개정의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는 번역은 누가의 신학적 특징을 잘 반영하지 못한다. '침입하다'는 동사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의 '힘써 들어간다' 혹은 '들어가기를 힘쓰다'로 번역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마태는 세례 요한을 폭력의 형태로 특징 지워지는 지금의 하나님의 나라의 시대 속에 포함시킨다(마 11:12a). 하나님의 나라 천국과 관련하여 마태는 '비아제타이'를 수동태로 이해한다. 마태에게 있어서 천국의 현재성은 공격당하고 폭력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도 마태는 헤롯 안티파스에 의한 세례 요한의 죽음과 로마인들에 의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태는 축복선언에 있어서도 '박해받다'는 말을 덧붙인다(마 5:11; cf.눅 6:22). 이러한 이해는 마 11:12b에서 더욱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침노하는 자들이 천국을 강탈한다." '침노하는 자들'(비아스타이)은 이후의 기독교 문서에서도 한결같이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며, 또한 동사 '하르파조'는 '악한 자'(마귀 사탄)의 빼앗는 행동을 가리킨다(마 13:9). 따라서 "하늘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표준새번역)는 해석은 마태 본문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아니다. 오히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개역개정)는 해석이 바른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침노를 당함'과 '침노하는 자'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사람의 노력으로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시도는 잘못이다. 이는 마태 본문을 누가 본문처럼 읽는 것이다.

오늘의 두 본문에 대한 이해는 예수 전승(Jesus tradition)이 복음서 기자들의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재해석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본래적 예수 전승을 담고 있는 예수 어록(Q)의 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예수 어록의 연구는 복음서의 연구인 동시에 예수를 처음 따랐던 무리들(그룹 또는 공동체)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과연 그들이 굳게 부여 잡았던 확신과 소망을 포함하는 하나의 '상징적 형태'(symbolic form)가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은 자연히 예수가 주창한 "하나님의 나라"라는 상징적 형태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김형동 교수/부산장신대·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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