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 다시 보기(고전 11:17-34)

성만찬 다시 보기(고전 11:17-34)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16-완

김형동 교수
2019년 07월 26일(금) 00:00
고전 11장 17~34절에서 바울의 주된 관심은 온전한 성례전 수행이나 혹은 성례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공동식사로 모일 때에 일어나는 갈라짐과 분파 그리고 그것의 실제적 삶의 함의에 있다. 편지의 서두에서 제기한 분쟁의 문제(1:10)에 대한 그의 관심을 상기시키면서 바울은 다시금 그 문제를 언급한다(11:18). 첫째, '모이다'는 동사는 본문에서 다섯 번 반복됨으로써 본문 전체를 지배하며(17, 18, 20, 33, 34), 또한 본문의 시작(17)과 끝(34)에 등장함으로써 수미쌍관구조(inclusio)를 이룬다. 둘째, 다섯 번 중에서 두 번은 이 모임의 목적이 '먹기'(20, 33)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공동식사의 관행으로 말미암아 생긴 가난한 자들(어떤 사람은 시장하고)과 부유한 자들(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간의 갈라짐으로 인한 공동체의 문제에 직면해 바울은 공동체를 질책하고서 그들의 모임이 '유익'이 되기 위해, 그들의 공동식사를 새롭게 하기 위해 예수 전승으로부터 권위 있는 모범례를 제공한다. 성만찬 전승은 자기를 내어주는 자기희생(self-giving)의 서사적 모델로 제시된다.

바울은 예수 전승에 호소한다. "왜냐하면 내가 주께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노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자신을 내어주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고전 11:23). 여기서 동사 '받은'은 능동(중간태)으로도 수동(수동태)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나(바울)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갈 2:20)분이시다. 서방교회의 전승을 반영하는 '잡히시던'이라는 번역은 유다의 행동을 가리킨다. 오히려 '내어주시던'은, 동방정교회의 해석과 같이, 중간태로 '자신을 내어주던'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위이며…동시에 인류 구원의 하나님 자신의 행위'를 가리킨다.

첫째,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는 표현에서, 예수의 편에서의 자기희생의 행위에 대한 강조와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한 행위가 강조되고 있다. 둘째, 그러한 자기희생의 강조점은 이어서 나오는 잔에 관한 말씀에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며 백성들에게 피를 뿌렸던 것을 연상시킨다(출 24:8; 참조. 슥 9:11). 또한 '새 언약'은 예레미야와의 약속 가운데 나타나는 말씀으로 죄용서와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통해서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그러한 언약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렘 31:34) 비준되어 언약의 백성이 하나님과, 그리고 그들 서로 서로가 함께 묶여진 것이다. 바울이 여기 예수의 성만찬 전승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는 떡과 잔이 주께서 자신을 내어주심을 나타낸다는 것과 이러한 예수의 자기희생은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의 진정한 교제의 본보기라는 것이다. 셋째, 성만찬 전승의 이러한 이야기가 단지 하나의 고귀한 행위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라는 점은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11:24, 25)는 명령으로 더욱 분명해진다.

"이것을 행하라"는 말씀의 반복은 바울의 현재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가장 좋은 단서를 제공한다. 바울은 이 말씀과 더불어, 26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라"는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다. 그렇다면 주의 만찬과 관련된 바울의 일차적 관심은 주의 '죽으심'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예수의 자신을 내어주심(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과 바로 뒤의 명령, "행하라"는 말씀을 연결시키는 수사학적 연결고리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읽기가 가능하다. "내가 너희를 위해 한 것(내 자신을 내어준 것)처럼 '이것' 즉 다른 이들을 위해 너희 자신(과 너희의 재원)을 내어주라."

성만찬 전승은 자신을 내어주신 주의 죽으심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적인 가정에서의 배불리 먹으라는 유보적 해석은 성만찬 전승과도 전체 맥락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22절과 34절의 집은 개인적 집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모임의 장소를 가리킨다. 22절,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34절,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심판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70인역에서 '집'이라는 개념은 한편으로는 장소로(성전을 '하나님의 집'으로 부름. 예:삼하 12:20),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이스라엘의 집, 예:출 16:31)로 이해된다.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 역시 '집'이 장소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은유적 표현임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를 제공한다(행 18:7).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모이는 '집'(가정 교회:house church)을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장소로 활용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이 공동식사는 예수의 자기희생의 모델에 근거한 주의 만찬인 것이다. 공동체의 모임은 곧 하나님의 교회요, 따라서 공동체의 가난한 이들이 모욕당하는 것은 바로 공동체를 불러 모으신 하나님이 무시당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바로 그 이유로 모든 사람을 성찬에 초대하심으로 성찬은 하나님의 집인 세상을 섬길 사회적, 윤리적, 선교적 책임을 포함한다.

김형동 교수/부산장신대·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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