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과 함께 예수님 품으로

요한복음과 함께 예수님 품으로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1

박영호 목사
2019년 12월 06일(금) 00:00
헬라어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요한서신과 요한복음은 접근이 쉬운 책이다. 간결한 단문, 명징한 개념으로 헬라어 초심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준다. 동시에 심오한 신학사상이 담긴 책으로 정평이 나있는 책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공관복음은 사실 중심의 역사적인 책이고, 요한복음은 의미 중심의 신학적인 책이라고 하는 견해가 우세했다. 그러나 공관복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한 번 예루살렘을 방문하며 끝나는 공생애의 구조는 신학적 구성물임이 밝혀졌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공생애는 일 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공생애동안 세 번의 유월절을 맞으신 것을 기록한다(2:13; 6:4; 11:55). 우리가 알고 있는 3년의 공생애는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다. 요한복음을 비역사적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 공관복음도 신학적이면서 역사적이고, 요한복음 역시 신학적이면서 역사적인 책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요한의 신학에서 가장 주목받는 부분은 이른 바 고등기독론(high Christology)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인성이 강조되었는데, 후대에 갈수록 예수의 신성이 강조되는 신학이 출현했다는 구도로 요한의 기독론을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역사적 예수와 초기 교회와는 거리가 먼 신학적 구성이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마가복음보다 훨씬 먼저 기록된 빌립보서에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2:6)라는 언급이 나오는 등, 이른 바 고등기독론이 반드시 후기의 것이라 못박는 견해는 지지를 받기 힘들다. 래리 허타도나 제임스 던 같은 학자들은 예수의 부활 직후부터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예배했다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다른 공관복음보다 늦게 쓰여졌을 가능성은 높지만, 그 신학적 핵심은 초기 기독교의 것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모든 복음서는 그 복음서가 쓰여진 당시의 정황이나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고, 요한복음은 그 색채가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의 말씀 중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3:11)"라고 하는 대목은 역사적 예수의 말씀을 공동체의 삶의 정황에서 전해 왔음을 추정하게 해 준다. 1장에서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로 시작하여 3인칭으로 글을 이어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하는 대목에서 갑자기 "우리"가 등장한다. 이 우리는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생긴 "우리"이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공동체를 창조한다.

요한복음의 공동체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는 명을 받은 공동체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는 약속이 함께 주어졌다. 공동체의 최고의 사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능해졌다. 또한 이 사랑으로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 주는 사역, 선교가 가능해진다. 요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선교적교회(missional church)는 프로그램으로서의 선교가 아니라 삶으로서의 선교를 발견하자는 것이다. 그 삶은 서로 사랑하는 삶이다. 일면 공동체내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요한복음이 다른 어떤 성경보다 선교적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이유이다. 선교적교회론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레슬리 뉴비긴이 요한복음강해를 쓴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바로 선교이며, 이 선교는 사랑의 공동체로 가능해지며,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로 가능해진다. 1장에서 예수님을 모세와 비교하면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8)"고 한다. 모세가 하나님을 보았느냐, 못 보았느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품에 안긴 독생자라는 말은 그 모든 논란을 종식시킨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시는 분이시다. 13장에서는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23)"있는 제자가 등장한다. 하나님의 품 안에 예수님이 안겨 계시고, 예수님의 품 안에 이 제자가 안겨 있는 모습이 요한복음 전체를 이끌고 가는 큰 그림이다. 이 제자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지칭되다가, 결론부에 가서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21:24)"는 말로 복음서의 저자로 소개된다. "요한복음"이라는 표제는 후대의 것이며, 본문은 철저하게 저자를 익명으로 유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세베대의 아들 요한을 저자로 꼽아 왔고,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를 끝까지 익명으로 기술한 의도를 존중하여 읽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본 지면을 통해 요한복음을 해설하면서 저자의 익명성 존중이라는 해석학적 렌즈는 계속 염두에 둘 것이다. 그 의도 중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친밀한 품에 안긴 제자라는 특권을 어떤 특정한 인물에만 제한하지 않으려는 뜻이 아닐까 싶다. 그럴진대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품에,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는 꿈을 꾸어볼 수 있을 것이다. 본 해설의 주제를 이렇게 잡아 본다. 요한과 함께 예수님 품으로!

박영호 목사/포항제일교회, 전 한일장신대 신약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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