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공동체의 자기이해

요한공동체의 자기이해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3

박영호 목사
2019년 12월 20일(금) 00:00
프랑스 북부 지베니라는 마을에 살던 클라우드 모네는 이웃집 농장에 쌓아 놓은 건초더미에 햇빛이 비취는 모습을 보고 딸에게 캔버스를 두 개 가져오라고 한다. 해가 비취는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두 장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곧 모네는 두 개의 캔버스에 담을 수 없는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캔버스를 있는 대로 동원하여 건초더미를 그려 나간다. 황량한 벌판에 쌓여 있는 건초더미라는 평범한 대상으로 25개의 작품을 남겼다. 같은 대상이 아침과 저녁에, 맑은 날씨와 흐린 날씨에, 또 계절의 변화에 따라 얼마나 바뀔 수 있는지 섬세하게 관찰하고 표현해 냈다.

우리는 예수님을 묘사한 네 개의 정경복음서를 갖고 있다. 같은 예수님이지만 보는 사람들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의 예수님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독특한 예수 고백은 그들의 독특한 사회적 상황에서 연유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바깥세계와의 갈등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유대인들과의 갈등, 그리고 세례요한 추종자들과의 경쟁이 두드러진다.

유대인들은 예수와 대결하기도 하고, 오해하기도 한다.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선생'의 자격으로 등장하며, 중요한 상징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지만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다(2:24)"고 했는데, 니고데모는 이런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다. 율법 지식 면에 있어서나, 예수에 대한 호의라는 면에 있어서나 그는 최선의 유대인이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아노센 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한다. 아노센은 '위로부터, 다시'의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니고데모는 이를 '다시 태어난다'라는 말로 단정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반문하면서 인지능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13절에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 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하면서 이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3장에서 세례요한은 예수의 탁월성을 '하늘에서 주신 바'된 사역이라고 말한다.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예수의 정체성이 요한공동체를 유대인들, 세례요한 그룹과 차별화하는 핵심요소이다.

웨인 믹스는 '하늘로부터 온 사람(The man from heaven)'이라는 기념비적 논문에서 '내려온다, 올라간다, 위로부터' 등이 요한의 기독론과 공동체의 자의식에 접근하는 열쇠단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요한복음의 언어와 상징의 사용을 지식사회학의 용어인 '상징적 세계(symbolic universe)'라는 용어를 빌려서 분석한다. 니고데모의 무지는 문학적인 면에서 보면 요한복음의 독자들이 이 사람에 대해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은 모르지만 우리는 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는 선언, 연회장은 알지 못하는데 "물 떠온 하인들을 알더라(2:9)"는 등의 표현은 그리스도에 대한 참 지식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자의식의 표현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17:3)"이라고 할 만큼 앎은 요한복음에서 결정적이다(참조 4:22).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도마와 베드로는 차례로 어리석은 질문을 던진다.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물을 때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13:36)"고 대답하심으로 현재의 무지가 극복될 때가 올 것임을 분명히 한다. 이 주제는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14:19)"라는 말로도 표현되는데 '조금 있으면'라는 말이 반복되면서 (16:16, 17, 18, 19) 제자들이 예수를 제대로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약속한다. 제자들의 궁금증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정체를 호기심을 갖고 추적하게 하는 장치이다. 요한의 독자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마침내 높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이른다. 부활 후에 뒤늦게 "나의 주 나의 하나님(20:28)"이라고 고백하는 도마는 요한복음을 제대로 읽은 독자라면 도달할 수밖에 없는 지점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21장을 추기로 본다면 도마는 예수의 정체를 두고 벌어졌던 온갖 오해와 혼란을 종결짓는 역할을 훌륭히 하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하늘에서 온 존재'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그들 역시 예수와 함께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들, 세상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규정된다.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박해와 소외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공동체는 외부의 압력에 굴하여 예수에 대한 신앙을 타협하지 않고, 정확하게 반대의 방향, 그들이 믿는 예수를 더 또렷하고 선명하게 고백하는 방향을 택했다. 요한의 독특한 기독론은 밖으로는 교회를 압박하는 지배 문화에 저항하고, 내부적으로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함으로써 강력한 결속력을 가진 공동체를 세우고자 했던 이들의 결연함이라는 렌즈로 읽어야 한다.

박영호 목사/포항제일교회·전 한일장신대 신약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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