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생태정의에 대해 말하려면

교회가 생태정의에 대해 말하려면

[ 현장칼럼 ]

김신영 박사
2021년 03월 17일(수) 17:19
환경문제는 우리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사안이다. 기후변화와 탄소배출, 친환경산업과 재생가능에너지는 정치나 경제,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조명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가장 드러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환경정의 혹은 생태정의의 문제이다. 울리히 벡은 산업사회와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진보와 풍요로움을 선사했지만 동시에 위험도 야기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위험이 전 세계적인 것이고 결국 모든 인류가 처하게 될 상황이라 하더라도 위험에 노출되는 정도와 시기는 상대적이다. 보이지 않는 먼 지역이나 사회 외부로 위험을 전가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사회는 그들이 야기한 위험의 도래를 어느 정도 미룰 수 있지만, 그러한 수단을 갖지 못한 사회는 그들이 야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의 직접적이며 치명적인 피해자가 된다. 우리가 사용하고 버리는 폐기물은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소비하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생산되어 어떤 시스템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지에 대해 우리는 잘 모른다. 음식물 쓰레기를 바다에 갖다 버리던 것이 금지되자 음식물쓰레기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중국이 외국으로부터의 쓰레기 수입을 금지하자 우리나라의 폐플라스틱 처리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우리는 다른 나라에 유독한 폐기물의 처리를 맡겼고, 음식물쓰레기를 바다에 투기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들을 우리 땅 어딘가에서 처리해야 한다. 위험을 영토 밖으로 보내는 것이 금지되자 우리 사회 안의 누군가가 이 위험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처럼 환경정의나 생태정의의 문제는 사회의 구조나 제도, 물질적 흐름을 통해 표면화되고, 우리가 주변에 있는 물질들의 흐름을 세밀하게 관찰할 때 비로소 보이게 된다. 반대로 자연을 추상화하고 신비화 하는 방식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데, 이런 식으로 환경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환경정의나 생태정의가 포함하는 권력과 지식, 물질과 힘, 문화나 제도의 네트워크를 간과하게 만든다.

생태적 부정의는 주로 자연환경과 신체를 통해 물질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종교적 언어로 생태적 부정의를 표현하는 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생태적 부정의는 물질적으로 드러나고, 사회적-제도적 차원에서 절차적 정당성을 통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생태정의운동은 영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들의 가치와 연결망을 실제적으로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생명과 살림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 진정한 생태적 회심과 각성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태위기의 절박함을 담을 수 있는 언어와 내러티브가 필요하다. 청지기 신앙이나 창조신앙과 같은 전통적 언어들을 가지고 현재의 생태위기와 생태 부정의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김신영 박사/생태인문학자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