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한 행함으로

꾸준한 행함으로

[ 현장칼럼 ]

하태화 부장
2021년 04월 22일(목) 14:41
하태화 부장
새 학기가 시작하는 봄, 늘 설렘임과 기대감이 있다. 따듯한 햇살과 시샘하는 꽃샘추위도 봄을 실감케 한다. 딱 요즘 날씨 같았던 1995년 어느 날이다. 그때는 호출기와 공중전화가 연락 수단이었다. 버스 정류장 옆에도 공중전화 부스가 있고 늘 줄이 늘어서 있곤 했다. 그래서인지 그 주변에는 홍보 전단이 붙었다. 형광 켄트지에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봉사 내용은 장애인, 노인, 아동 가정방문, 말벗이나 학습지도였다. '장애인들과 몸 부대끼며 살아야지'라고 생각하던 시절이라 전화를 걸었고 약속을 잡고 복지관에 방문했다.

그때 나와 결연이 된 아이는 12살 지체 장애 1급 여자아이였다. 아빠는 암으로 돌아가셨고 이후 엄마는 가출, 85세 된 할머니와 15살 오빠가 함께 살았다. 매주 금요일 오후 방문했다. 미희(가명)는 목발 없이는 이동이 불가했지만 명랑한 성격이라 금세 친해졌다. 소꿉놀이도 하고 가끔은 학습지도도 했고 동네 아이들을 모아 함께 놀기도 했다.

미희네 할머니는 85세 고령에도 취로사업(요즘 공공근로, 노인 일자리 등) 에 참여하셨고 살림을 잘 챙기지 못하셔서 단칸방과 부엌은 어수선했다. 가끔은 미희랑 마당 수돗가에서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함께 했다. 이렇게 한해 두 해 시간이 지났다.

3년쯤 지났을까? 미희는 울면서 사춘기 오빠와 할머니 사이에서 힘든 일, 가출한 엄마에 대해 섭섭함과 분노, 간암으로 투병하던 아빠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등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어린 꼬마가 이런 아픔을 마음에 담고 어찌 살았을까 싶었다. "이렇게 힘든데 언니한테 진작 말하지"라고 하니 돌아오는 대답은 더 마음이 아팠다. "언니도 다른 언니들처럼 몇 번 오다가 말 줄 알았지, 근데 언니는 계속 오더라" 하는 것이다.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장애아동과 중학생 손자를 키우는 할머니는 조손가정으로 때로는 소년소녀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대상화되었다. 후원, 봉사자들의 손길이 필요했고 언론의 관심을 받기도 좋았다. 이렇다 보니 많은 연결이 있었고 그만큼 단절도 경험했다. 경제적 도움(후원)과 학습지도(봉사)라는 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활동은 지속되지 못했고 어느 순간 중단되면 그걸로 끝이었다. 미희는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쉽게 친해지는 듯하지만 속마음은 말하지 않게 되었다. 나 역시 언제든 안 올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미희네 가족은 기찻길 옆 월세방에서 영구임대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나는 졸업하고 그 아파트 단지에 있는 복지관에 취업했고 그곳에서 16년 9개월을 일했다. (밥상공동체복지관으로는 2016년 이직했다) 우리는 이렇게 계속 만남을 이어갈 수 있었다. 상급 학교를 진학하고 직업훈련을 받고,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을 함께 고민하고 준비했다. 치매로 고생하시던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사춘기 앓이를 심하게 하던 오빠는 마음잡고 취업을 했다. 미희는 고객센터 전화 상담원으로 일을 하며 정부 지원이나 후원자의 도움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새내기 대학생 언니는 두 아이 엄마로 현장을 지키는 사회복지사가 되었고 미희는 장애를 딛고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잘 성장했다. 해마다 벚꽃이 날리면 포동포동한 꼬마 미희를 만났던 봄날의 햇빛 냄새가 난다.

미희와 함께한 이 경험은 사회복지사로 사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 좋은 뜻에서 시작했지만, 상처가 될 수 있기에 후원이든 봉사든 신중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권한다. 마음이 앞서 크게 하는 것을 지양하고 작지만 오래 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쉽지 않은 과정이다.

올해 우리 교회 주제는 '하루 말씀 세 절 쓰고 그날 영육 건강 만점' 이다. 부서별로 공책을 사서 나누고 매일 해보자 다짐했다. 난 오래전 성경 쓰던 것이 생각나 이참에 이어 쓰자고 생각하고 노트를 찾았다. 날짜를 보고 깜짝 놀라 너무 어이가 없어 웃었다. 2011년 4월에 창세기를 쓰기 시작했고 2014년 출애굽기 1장까지 쓰다 말았다. 이런 10년째 쓰고 있는데 출애굽기까지도 못 쓰고 있는 연약한 존재다.

꾸준히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참 어렵다. 그래서 단순하지만, 일관성을 갖고 지속하는 것이 우리네 삶에서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하태화 부장 / 밥상공동체종합사회복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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