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있는 나눔

품격있는 나눔

[ 현장칼럼 ]

황신애 이사
2021년 10월 01일(금) 08:10
20년 전 처음 모금을 할 때 1억 원을 기부하는 사람들이 실로 대단해 보였고, 기부자들은 모두 훌륭한 인품과 가치관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더 많은 기부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돈을 버는 과정과 기부를 하게 된 동기 그리고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기를 바라는지 등의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그들에 대한 나의 환상이 깨지기 시작했다.

기부자들은 다 달랐다. 동기는 순수했지만 그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이 아름답지 못한 경우도 꽤 많았다. 일부에게는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기도 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았다. '기부의 무게는 다 같은 것일까'라는 질문이 내 안에 스멀스멀 올라왔다.

체다카(tzedakah)라는 히브리어가 있다. 자선이라는 뜻으로 많이 번역하지만 흔히 알고 있는 '남을 위해 베푼다'는 뜻과는 사뭇 다르며 '마땅히 해야 할 행위(공의)'의 뜻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이고 명령이다. 신명기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베풀라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바로 그 맥락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십일조와 자선을 훈육한다. 집에 자선을 목적으로 돈을 모으는 저금통을 하나 두는데 이를 '체다카'(Tzedakah)라고 부르기도 하고 유대인 시장의 풍경 중에 오후가 되면 팔던 물건의 일부를 한쪽에 떼어놓고 필요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게 하는데, 이 역시 체다카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탈무드에 보면 체다카에도 등급이 있다. 가장 고결한 것은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이 스스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방인이 낯선 땅에서 살면서 궁핍하지 않도록 선물, 일자리를 주거나 파트너나 후견인이 되어 그가 스스로 삶을 일구도록 여건을 제공한다. 그 다음 수준은 주는 이나 받는 이가 서로를 모른 채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고, 그 다음은 산타클로스처럼 주는 사람은 받는 이를 알지만 받는 사람은 누가 자신을 돕는지 모르게 함으로써 자존감을 지켜주는 방식이다. 그 다음은 받는 사람은 알지만 주는 사람은 누굴 돕는지 모르는 것인데, 예를 들면 부자가 길거리에서 어깨 뒤로 돈 뭉치를 던질 때 가난한 이들이 돈을 주워가는 방식이다. 이보다 못한 것이 가난한 이가 도와달라고 말하기 전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그 다음이 도와달라고 말할 때 돕는 것이며, 그 다음은 기꺼이 돕되 충분하지 않게 돕는 것이다. 가장 낮은 수준은 마지못해 또는 불쾌함을 내비치면서 돕는 것이다.

명절이 가까와지고 추운 계절이 돌아오면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을 기억하고 무언가 작은 것이라도 나누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를 위해 재물과 시간을 사용하고 아낌없이 헌신하는 일은 그 자체로 훌륭하고 인정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하다고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몇 해 전 명절을 맞아 방문팀을 구성해서 보육원을 찾아간 적이 있다. 명절에도 딱히 돌아갈 가정이 없는 아이들에게 줄 선물과 음식들을 잔뜩 싸 가지고 갔고 직접 요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부 자녀들을 동반한 가정이 있었다. 그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들에게 좋은 섬김의 기회를 주려는 순수한 의도였겠지만, 또래 아이들과 마주친 보육원 아이들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던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내가 한 작은 선행이 스스로 뿌듯하고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가끔 기념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사진 한 장 촬영할 수도 있고, 주변 지인들과도 내가 한 보람된 일을 공감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에 사진을 올리면서 착한 일을 권하기도 한다. 다만, 그런 사소한 행위를 할 때 나와 반대 입장에 서 있는 그들의 마음을 한 번만 더 헤아려보고 신중한 결정을 하면 어떨까 싶다. 내가 한 일을 아무도 몰라주고 누구로부터도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행한 선한 일은 변함이 없고 그로써 충분하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나눔의 품격 아닐까.



황신애 이사 / 한국모금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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