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길 위에서

[ 현장칼럼 ]

송기훈 목사
2022년 04월 01일(금) 00:10
송기훈 목사
잘 닦인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문득 이 길은 누가 먼저 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 때가 있다.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처음 산을 넘은 이를 따라 누군가 그 길을 걸었을 테고 그 뒤를 또 다른 이가 걸었으리라. 수많은 걸음이 쌓여 오랜 세월 동안 다져진 길이라 생각하면 왠지 발걸음에 좀 더 무게가 실리는 것 같다.

복음서의 저자 마가가 바라보는 예수님은 '길을 가는 분'으로 그려진다. 갈릴리와 가버나움, 유대와 예루살렘 심지어 이방지역을 육로와 수로를 통해 넘나드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사건을 마주한다.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은 사람들과 논쟁하고 병든 사람을 고치며 길 위에서 살아가다 죽는다. 그렇게 마가는 복음의 시작부터 죽음에 이르는 삼 년간의 시간을 길 위에 속도감 있게 펼쳐낸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많은 이들도 성서에 새겨진 발자취를 따라 걸어왔다. 고난과 절망의 숲을 헤치고 오롯이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는 이 길의 끝이 어디쯤인지, 내가 얼마나 걸어왔는지 아득해지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일렁이는 파도처럼 역동감 넘치던 순간이 단조로운 해안선으로 변하고, 속도감 있던 내리막길이 지루한 풍경처럼 멈춰버린다. 금방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문제조차도 그 한 가운데에 들어가 있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뜻을 함께하는 기독교 단체들과 함께 매주 길거리에서 기도회를 진행한다. 길거리 기도회의 주인공은 주로 성실히 일하다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해고하기 쉬운 하청업체로 연결된 왜곡된 고용구조로 인해 부당하게 해고를 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심지어 법원에서 부당해고 판정을 받은 경우에도 정부나 기업 누구 하나 책임지고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상황을 마주한 채 길 위에서 길게는 몇 년의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억울한 사실을 알리려는 마음이 간절한 노동자들은 곡기를 끊기도 하고, 사람들이 걷는 길을 기어서 지나고, 심지어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길을 찾아 오르기도 한다. 이들과 함께 기도회를 할 때마다 실감하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오신 주님을 따르는 길이 내가 앉아있는 이 길바닥 위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도회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매주 이어간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궂은 날에는 차라리 함께 비를 맞고 버틴다는 마음이라도 들지만 화창한 날에 길 한복판에 앉아있으면 여기 있는 것이 이분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무기력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돌아가야 할까, 멈춰야 할까. 그럴 때면 가끔 농성장 옆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는 이들을 본다. 각자 저마다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다시 눈을 돌려 농성장 안을 본다. 여기에도 사람들이 있다. 함께 걸으며 길을 다지는 사람들이다. 지친 얼굴에 빙긋 웃음을 건네며 이들이 내미는 손을 맞잡는다. 주저앉으려는 나를 다시 일으켜 주는 그 손을 붙잡고 오늘도 길 위에 함께 선다.



송기훈 목사 / 영등포산업선교회 교육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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