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돌보는 공동체 학교

서로 돌보는 공동체 학교

[ 현장칼럼 ]

안지성 목사
2022년 10월 28일(금) 00:10
안지성목사
코로나 19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세상을 갑자기 우리 곁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이 무너지고,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도 그 중 하나다. 대다수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학교는 교육을 하는 곳이라는 막연한 합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학교를 쉼으로 느끼게 된 공백은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점심 급식의 공백이 컸고,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맺었던 관계나 사회적 교류의 공백, 신체 활동의 공백까지 …. 학교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수행했던 기능은 지식을 전해주는 교육 그 이상의 것이었다. 학교는 학령기 아동 청소년들에게 안전한 있을 곳과 먹을 거리를 제공하는 돌봄의 공간이었고 친구들과 선생님들과의 관계를 통해 적절한 사회화의 과정을 경험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것은 최소한의 돌봄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 적절한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맞닥뜨리는 현실은 코로나로 학교가 멈추게 되었을 때 모든 청소년들이 마주했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코로나는 전체를 멈추게 했지만, 학교 부적응 청소년들은 학교와 친구들은 여전한데 그들만 제외된다는 점이다. 그들만 돌봄의 부재를 경험하고, 그들만 사회적 관계망으로부터 고립된다. 이러한 위기에 노출된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 동아줄로 선택하는 것이 대안교육 위탁교육기관이다.

지난 해, 한 해를 함께 보냈던 아이들은 이렇게 저렇게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중 2명의 친구들은 지금도 일주일이 멀다 하고 우리 공간을 들락거린다. 아직 새로운 학교에서 완전히 적응을 못했다는 뜻이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지 못했거나 여전히 마음 둘 곳이 없어서 잠시 와서 수다를 떨고 가거나, 멘토 선생님과 원하는 공부를 하기도 한다. 또 다른 친구는 심각한 사안으로 의뢰되었던 친구였는데 원래 다니던 학교에 무슨 일 있었냐 싶게 적응을 잘 해서 선생님들의 감사 인사가 한 트럭이다. 학교 다니는 동안 말 한마디 없이 졸업한 친구는 참 감사했노라며 뭐 도울 일은 없느냐고 의젓하게 묻기도 한다.

우리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느꼈던 그 답답한 순간들에도 아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 일들 속에서 아이들은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맑은 거울 같다. 그런데 점점 더 아이들이 많이 아픈 것처럼 느껴진다. ADHD, 우울, 불안, 공황, 자해충동 등 아이들이 보여주는 정신 건강의 지표는 점점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아이들 사이에서 만연한 학교 폭력, 거의 일주일이 멀다 하고 열리는 학교폭력위원회를 보고 있으면 무언가 중요한 것이 놓쳐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각자의 이유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대안교육 위탁교육기관이라는 새로운 학교에 자리 잡은 아이들에게 이 작은 학교는 어떤 공간으로 기억될까? 대단한 대안이 되기 보다는 그냥 지금의 학교가 수행하고 있던 순기능을 이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맛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안전하게 머물 곳과 제 때에 먹을 거리를 제공하는 돌봄,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관계의 연습, 이것만 할 수 있어도 꽤 근사한 학교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무척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조금만 더 알게 된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어쩌면 우리의 꿈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날마다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지성 목사/ 새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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