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전 편집국장 고환규 목사 별세

본보 전 편집국장 고환규 목사 별세

14일 귀가 중 교통사고 당해, 17일 오후 별세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22년 07월 17일(일) 19:34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가 발효되면서 신문편집과 관련 정부기관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았던 고환규 전 편집국장이 당시 전량 회수되어 일반에 공개되지 못한 기사 등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 /한국기독공보 DB
 고환규 목사(본보 전 편집국장, 관악교회 원로)가 17일 오후 5시경 별세했다. 향년 83세. 고 고환규 목사는 지난 14일 서울 영락교회에서 열린 새생명살리기운동본부 월례회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횡단보도에서 오토바이에 치여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응급실로 호송되어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18일 현재 유족들은 서울대병원에 빈소를 마련했으며, 20일 오전 5시 30분에 장례예식을 가진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아내 이영자 여사 외 1남 1녀가 있다.
 본보 편집국장으로서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취지의 글을 꾸준히 게재했던 고 고환규 목사는 유신정권의 1974년 1월 8일 오후 5시 긴급조치 1호 발효 후 1월 14일과 15일 신문편집과 관련해 정부기관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는 연행기간에 고문을 당했고, 17일 오전 9시 서울대부속병원에 입원했다가 같은 달 31일 목발에 의지하여 퇴원하면서도 총회 전도부 총무실에서 예장인권위원회를 조직했다.
 고 목사가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총회의 민주주의 회복과 생명과 인권 관련 글들이 본보에 보도되자 당시 동아일보사가 발행하는 신동아 1975년 3월호(97~98쪽)에서는 '자유언론의 기수-기독공보'라는 제목으로 특집기사를 보도하기도 됐다.
 그러나 당시 신동아는 배포되자 마자 즉각 전량 회수돼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못하다가 발간된 지 34년 만인 2009년에 처음으로 전문이 공개된 바 있다. 당시 고환규 목사를 인터뷰했던 김언호 기자는 '자유언론의 기수 기독공보'가 "일반 언론이 좌초 되고 있을 때 과감한 필봉을 휘둘렀다. 1970년대 전반기에 '기독공보'는 고군분투, 자유언론의 찬란한 발자취를 기록했다"고 전제하고, "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가 내려져도 '기독공보'는 계속 필봉을 가다듬었다. 긴급조치령이 내려진 직후인 1월 12일자는 2면에서 '민의 존중하는 정부 염원'제하로 '국민의 기본적 자유, 누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앙케이트'기사를 실었다"면서 "… 교회의 민주회복, 인권회복등을 대대적으로 보도, 이러한 운동을 가속화 시켰는데 10월 9일자는 예장 55회 총회의 '시국선언문'을 보도하면서 '구속자 석방 촉구' '비민주적 요소 제거토록'이라는 제하로 크게 보도했다. 동보(同報)는 때로는 사설로 강력한 대정부 발언을 계속 했다."고 보도 했다.
 고 목사는 이후 1974년 말 본보 편집국장을 사임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로 자리를 옮겨 인권위원회 간사 및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고 목사는 관악교회에서 시무했으며, 은퇴 후 서울관악노회 원로·공로이자 생명과인권사랑공동체 대표로 인권 관련 운동을 이어나갔으며, 한국목양문학회, 한국목사합창단 등 예술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고 목사는 지난 2005년 민주화 운동과 인권선교, 생명살리기 운동 등에 앞장서며, 교회 주변에 거주하는 저소득층 가정 자녀들을 위한 공부방 운영 등 지역사회를 봉사활동에도 앞장서 온 공로를 인정받아 총회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표현모 기자


표현모 기자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